나는 아주 작고, 그래서 조금은 자유로웠다
헬싱키의 서머타임이 바로 전날 끝나면서 한국과의 시차는 8시간으로 한 시간이 더 늘어났다.
원래 한국에서도 10시면 잠들고 새벽부터 일어나는 게 습관이었기 때문에 헬싱키에 도착해서도 여기 시간으로 초저녁만 되면 졸음이 쏟아졌다.
결국 매일 저녁 8시면 잠에 들었다가 새벽 2시면 깨는 패턴이 여행 내내 이어졌고 덕분에 아침은 말도 못 하게 길게 느껴졌다.
시골 사는 노인네처럼 새벽 2시에 깨서 한국에서 챙겨간 커피를 타 마시고 호텔 조식이 시작되는 7시까지 아
이패드로 드라마나 보면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사실 저녁 8시면 헬싱키도 특별히 할게 없어지는 것 같아 일찍 잠드는 건 크게 상관없었지만.
대화할 일이 없어지니 고작 이틀새에 혼잣말이 늘었다.
헬싱키에 온 지 삼일째 되던 날 아침. 이날은 헬싱키 항구에서 페리를 타고 에스토니아를 당일치기여행하기로 정한 날이었다.
헬싱키와 에스토니아는 배로 두 시간 거리. 아주 오래전부터 발트해 3국을 언젠간 꼭 가보고 싶었기 때문에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 있을 때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페리는 미리 온라인을 통해 탈링크실자라인을 예매해 두었다.
호텔에서 항구까지는 트램으로 20분 거리. 계획형 인간인지라 헤맬 시간까지 계산해서 조금 일찍 호텔을 나섰다. 이날은 월요일이었는데 월요일 출근시간이면 전쟁터 같은 서울시내의 도로와는 다르게 헬싱키의 거리는 너무나 한적했다.
호텔 근처에서 웨스트하버로 가는 트램에 올랐다. 신기한 건 이 나라는 대중교통 이용 시 티켓을 넣거나 찍고 들어가는 게 없다는 점. 들리는 얘기로는 무임승차를 하다가 무작위 검표에 걸리게 되면 벌금을 내야 한다고 듣긴 했는데 여행 내내 한 번도 검표는 받지 않았다.(물론 모두 티켓을 구매해서 탑승했다.)
아무래도 배를 타는 시간이 정해져 있다 보니 조금은 초조해졌다.
혹시나 내리는 곳을 잘못 내려서 낯선 동네를 헤매면 어쩌나 쓸데없는 걱정까지 들었다. 멀리 항구가 보이긴 했는데 도대체 어느 타이밍에 벨을 누르고 내리는 건지 모르겠고 트램 안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었다.
"저기, 웨스트하버로 갈 건데 어디서 내리면 되나요?"
가까이에 있던 나이 지긋해 보이는 아저씨에게 물었다.
"페리 타러 가는 거지? 이다음에 내리면 된다."
싱긋 웃으며 친절히 대답해 준 아저씨는 나보다 먼저 내리셨는데 내릴 때도 내가 신경 쓰이셨는지 '이다음에 내려!'를 한번 더 외쳐주시고는 바이바이.
친절한 핀란드 아저씨 덕분에 무사히 항구에 도착해 발권을 하고 탑승층으로 올라와보니 인천공항만큼이나
큰 항구 통유리 너머로 내가 타게 될 크루즈선이 들어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도착해서 내내 흐린 날씨만 보여주던 헬싱키가 이날만큼은 구름이 걷히고 맑은 해가 보였고 햇살과 같이 윤슬이 반짝반짝하게 보이는 그야말로 망망대해에 어마어마하게 큰 크루즈선이 천천히 정박 중이었다.
태어나서 크루즈선이라곤 처음 본 지라 그 크기에 완전히 놀라 속으로 마구 소리를 질렀다. 타이타닉을 처음 본 영국인들 느낌이 이랬으려나? 혼자라 티를 못 냈는데 아마 누군가 같이 있었다면 호들갑 떨며 어머 어머를 외쳤을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마흔이 되어도 설레는 건 못 참겠다.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로 기분이 좋아져 빠른 걸음으로 크루즈선에 승선했다.
배 안은 커다란 쇼핑몰이 그대로 들어있는 것 같았다. 총 9개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중 주차층과 침실층을 제외한 서너 개의 층을 두 시간 동안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구경할 수 있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바다는 수평선 끝까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정말 망망대해였다. 햇살과 함께 예쁘다고 생각이 들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바다가 무섭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타고 있는 배는 분명 엄청나게 컸지만 그보다 훨씬 더 큰 바다 위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다. 갑자기 그게 너무 무서웠다. 내가 떠 있는 이 바다가 너무 넓었다.
그렇게 끝없이 펼쳐진 바다 위에서
사람이 대단한 자연을 마주하면 꼭 한다는 그 흔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끝까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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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에서는 바다 건너 도착한 에스토니아에서의 하루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