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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명인 Sep 29. 2016

이방인

인간인 척 하기

'나는 왜태어났을까. 나같은 쓰레기는 태어날 필요가 없었을 꺼 같은데.'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이 평소보다 몇배는 더 어렵다. 자고싶은 이유는 생각할 필요없이 분명한데 왜 일어나야 하는지는 날이갈수록 모호해지기만 한다. 그렇지만, 달리 살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남들이 그렇듯 일어난다.


하루에도 수없이 삶을 능수능란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마주친다. 빈틈이 거의 없다. 굳이 찾자면 더럽혀진 신발정도? 그 위에 헝클어진 신발끈정도? 그치만 나에게는 이 모든것은 어렵다. 간신히 해낸다. 당장에라도 누군가가 나의 작은 흠이라도 지적한다면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버릴 정도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치장하는 사람들을 보면 존경심마저 든다. 자기 자신에 대한 게으름 없는 그 섬세함에 장인정신마저 느껴진다. 난 모든걸 놓아버리고 싶고 종종 모든걸 놓는다.


그들의 완전무결함은 비단 보여지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사람들간의 사소한 다툼이나 우정, 작렬하는 사랑의 타는 감정조차도 그들은 잘 훈련된 서퍼같다. 파도를 잠잠하게 할 길은 없겠지만 파도를 누구보다 잘 타는 그들이다.


나는 가끔 애증의 감정을 섞어, 그들을 내 마음속에서 가축과 동등하게 폄하해본다. '얼마나 외로우면 조금도 떨어지지 않으려고 저렇게 간절히 상대방의 손을 꼭 잡고 있을까. 불쌍하다.' 우습다. 나도 안다. 제일 불쌍한건 나라는 걸.


자신의 존재를 확인받고자 했던 사랑은 결국 버림받음으로 끝났다. 누군가를 소유하려하고, 누군가에게 소유당하는 것은 극단적인 쾌락과 고통을 함께 주었다. 그러한 거대한 파도가 다시금 몰아친다면 나는 이내 포기하고 바다속으로 침잠할 것이다.


사랑이란 성욕을 잘 포장한 자기기만이다. 인간의 나약함과 불완전함을 드러내는 확실한 증표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도저히 답을 찾을 수 없는 모순이 사랑에는 지천에 널려있다. 그런데 그들은 용케도 그런 것들을 꽤나 가볍게 넘겨버릴 수 있다. 가령 그들은 살면서 수없이 이성을 만나는데 그것이 동시간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 만으로 쉽게 자신의 도덕감과 사랑의 숭고함을 지킨다. 헤어지고 이별노래를 부르다가 언제 그랬냐는듯이 새로 만난다. 금붕어같다. 아, 나도 그렇게 간단히 행복해 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날이갈수록 자기가 옳다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반성하지 않는 모습이 놀랍다. 노인들을 아무렇지 않게 무시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그 시간의 갭을 가볍게 넘나드는 그들의 무모함이 가상하다. 그 사이에서 나는 들키지 않기 위해 오늘도 애써 웃는다. 입꼬리 올리는 것 역시 너무 힘겹다.


여하튼 그들을 보고있노라면, 자기 멋에 심취하고 주변 환경과 사상에 한치의 의심없이 물들어있는 그들을 보고있노라면, 인생이란 참으로 허무하기도 하다. 죽을때까지 끝내 풀리지 않을 얽힌 실타래는 진짜로 죽어도 풀리지 않는다.


타자 속 이방인임을 끊임없이 인식하면서도 별수없이 떼를 떠나지 못하는 나약한 나는 문득 고된 하루의 격무에 시달리다 생각한다.


"나는 왜 태어났을까. 불쌍한놈. 너낳고 미역국 먹은 부모님이 불쌍하다."


극한의 자기경멸과 자기동정으로 자기위로.


지금은 너무 지쳐서 술 한잔의 착란에 행복을 착각하듯이 나도 행복을 위해서라면 어서빨리 모두를 속이고 나 자신마저 감쪽같이 번뇌없이 속이고 싶다.


어라? 잠깐, 사실 행복이란건 원래 그런 거일려나.


벌써 시월이다. 극한의 고독이 덮쳐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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