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결혼식 날이다. 초대는 받았지만 참석치는 않을 것이다. 아마 그녀도 나의 참석을 바라고 청첩장을 보내지는 않았을 터.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내 나이 열일곱이었다. 나보다 두 살 어렸던 그녀는 첫눈에 내 관심을 사로잡았다.
"오빤 짜장면이 좋아요 짬뽕이 좋아요?"
"굳이 꼽자면 화끈한 짬뽕. 너도?"
"눈치 장난 아닌데?"
"눈치 빼면 시체지."
"오빠 벌써 마음에 든다."
그녀는 당돌했고 거침이 없었다. 여느 열일곱 살과 다를 바 없이 숙맥이었던 나는 그녀 앞에서 대답 대신 미소로 답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우린 사귀게 되었고 그녀는 나의 가장 큰 기쁨 중 하나가 되었다. 사랑과 함께 집착이 시작됐고 휘몰아치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져 지냈다.
얼마간의 연애 후 이별하였고 이별 후 마음을 채 추스르기도 전에 그녀의 새 남자가 나와 친하게 지내던 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순간부터 집착은 분노로 변했고 집착과 분노는 결합하여 더 큰 집착을 낳았다.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나를 사로잡았다.
전에 애지중지하던 자전거를 중고나라에 판매할 때도 비슷한 감정을 경험한 적이 있다. 자전거가 너무 낡은 것 아니냐는 친구의 한 마디에 판매를 결심하였고 구매자에게 판매를 약속할 때까지만 해도 오히려 속 시원한 기분이었는데 새 주인이 시승을 위해 안장에 올라타는 순간 참고 싶지 않은 분노가 내면 깊숙한 곳에서 솟구쳤다. 화를 내고 거래를 무산시켰다.
나조차도 영문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분노. 왜일까. 소유했던 것에 대한 애착일까. 새로운 주인에 대한 질투일까. 아니면 단순히 미숙한 내면의 단면일까.
소유가 아니었다. 그녀도 그 9만원짜리 자전거도 소유한 적이 없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동행'하였다. 그저 각자의 여정 속에서 일정 부분 동선을 공유하여 함께 걸었을 뿐. 우연히 마주쳐 잠시 함께 했을 뿐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 지나지 않았다. 그땐 미처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소유라고 느끼고 소유하듯 행동하는 것은 나약함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나약했기에 원했고 소유하지 못했기에 집착했으며 집착했기에 가질 수 없었다.
집착은 신기루처럼 우리를 기만한다. 잡힐 듯하지만 잡히지 않고 갈증이 심할수록 신기루에 쉽게 속고 만다. 다행스러운 것은 집착이 언젠가는 소멸한다는 점이다. 집착은 그 발생도 신기하지만, 소멸만큼 신기하지는 않다. 어느 순간 정확한 이유 없이 모든 감정이 소멸하여 우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남이 되고 각자의 여정을 이어나간다.
돌이켜보면 집착의 대상은 타인이나 특정 물건이 아닌 '나'였다. 그 외 모든 것은 그저 매개에 불과했다. 나를 향한 갈망이 너를 통해 발현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청첩장을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