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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명인 Jul 24. 2016

삶은 곧 예술이다

니체의 예술 철학 관련 에세이

철학자들은 종종 비슷한 오류에 빠지는 실수를 범했다. 그것은 바로 현상계의 것들을 개념화하면서 그 토대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오만한 이성은 모든 것의 완벽을 추구했고 기어코 완벽하지 않아 보이는 현상 세계와 그 속에 기투 되어 있는 인간을 도려내 버렸다. 세계는 진리의 아류가 되었고 현실의 감각적 애착은 죄가 되었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자신의 이데아론에 입각하여 예술가들은 진리의 이데아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방의 모방을 행함으로 이데아를 왜곡하는 가장 위험한 존재들이라고 말한다. 그럼으로써 예술은 이러한 아류를 모방하는, 진리에서 한 번 더 멀어지는 비참한 양식으로 격하되었고 이는 자연스럽게 현상계를 부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니체의 어법을 빌리자면 이 부분에서 모든 아폴론적인 것의 극단인 소크라테스적 도식주의가 탄생했고, 문명과 질서와 기타 모든 정형화된 개념들이 형성되었다. 하지만 이는 세계의 반만 해석하는 셈이었고 나머지 반쪽 세계에 대해서는 부정하고 외면한 것이다. 인간은 그런 의미에서 그동안 결핍되어왔다.


그렇다면 철학자들이 외면했던 반쪽 세계는 어떤 모습을 띠는가. 우리를 이 세상에 존재 가능케 하는 우리의 몸, 그리고 그 몸이 요청하는 욕망의 현실 세계다. 플라톤의 『파이돈』에서 소크라테스가 진정한 덕을 위해서라면 결국 철학자는 죽음을 갈구해야한다고 주창했을 때 이미 인간의 육체는 존재가 완전해지는 길에 방해가 되는 걸림돌에 불과했고 죽은 것이었다. 불과 몇 세기 전까지 이러한 삶에 대한 절대적인 관점은 서구 인간의 의식을 지배했었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인식은 삶을 점차 부정하게 만들었다. 형체를 가진 존재로서의 현실과 형체 없는 이상의 괴리는 좀처럼 좁혀질 수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삶은 점점 염세주의적인 방향으로 흐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유가 압살되고 철학의 암흑기였다고 여겨지는 중세철학이 그 교리의 토대를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으로 삼는 것이 뜻하는 바는 서양의 고대와 중세 철학 자체가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차이만 있을 뿐 인간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을 나타낸다.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삶은 이 세상 넘어 있는 것!’ 이러한 사상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등장하는 철학자가 나타난다. 스스로를 ‘망치를 든 철학자’라 말하는 바로 프리드리히 니체이다.


철학자 니체는 이러한 모든 사상들을 전복시키려고 했다. 니체는 소크라테스적 도식주의를 감상적이고 유약한 삶의 변명으로 받아들였고 그러한 것을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낙타에 비유하기도 하고, 『도덕계보학』에서 노예의 도덕으로 폄하하기도 하였다. 삶을 왜곡시키고 유약하게 만드는 절대적 도덕과 윤리를 거부하고 나 자신의 주인이 될 것을 천명한 니체는 병든 문명에 대한 대안을 소크라테스적 도식주의에 물들지 않은 고대 그리스의 비극에서 찾는다. ‘신이 죽었다.’ 고 말했던 니체는 이제 염세주의가 아닌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과제를 부여받았는데 이것이 바로 이제 삶이 신의 도움을 바랄 수 없는 비극적 상황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희극보다 비극에 주목했던 이유였다. 삶은 비극인 것이다! 니체는 생각했다, 아름다움을 추구하게 되는 이유가 삶의 비극성 때문이라면 반대로 정반대의 욕구 즉 추한 것에 대한 욕구, 비극적 신화, 삶의 근저에 있는 공포, 악, 수수께끼, 파괴로 대변되는 비극은 바로 기쁨, 힘, 넘치는 건강, 과도한 충만감에서 유래할 것이지 않겠냐고. 니체는 그의 저서 『비극의 탄생』에서 이러한 비극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는 미학적 관점인 아폴론적 세계와 디오니소스적 세계를 도출한다. 아폴론적 세계는 이 두 가지 충돌하는 세계가 화해하고 결합하여 더 높은 차원으로 고양시키는 것이 바로 비극인 것이다. 따라서 이 두 가지 세계 중 어느 하나를 좋은 것으로, 다른 하나를 나쁜 것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이 아폴론적인 세계와 디오니소스적 세계의 세계는 선과 악으로 구분되어있지 않고 실제로 인간의 본질은 선악과는 무심한 것으로 보았던 니체는 다만 그동안 아폴론적인 것의 극단이 지배했던 세계의 균형을 위해 디오니소스적 세계를 강조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세계의 이 두 가지 면을 분명히 알았고 이를 잘 조화시킬 줄 알았다.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인간과 세계와 만나는 두 가지 근원적 충동이다.아폴론적인 것은 꿈과 환영, 개체화를 지향한다.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도취, 무가상성, 개체의 합일을 지향한다. 그들은 낮에는 태양 아래에서 세계를 면밀히 통찰하려했고, 이 세계를 질서 있는 무엇으로 이해하고자 했다. 그 결과로 그들은 빛나는 대리석들이 기하학적 진리로 무장하여 웅장하게 서있는 신전들과 회랑들을 건축하였다. 그러나 해가 떨어지고 암흑이 오면 그들이 건축한 것들은 위태로워 보였다. 간신히 그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나와 너의 구분이 모호해진다. 이제 술의 신인 디오니소스를 위한 시간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들 안의 야수성을 마음껏 분출한다. 그것은 바로 비극의 선율을 통해서다. ‘디오니소스 제전’에서 그들은 이제 귀 기울인다. 철저히 파멸해가는 주인공에 몰입해간다. 그러면서 얻게 되는 삶의 힘을 직시한다. 니체는 이를 통해 삶을 긍정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잠시 그리스비극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시학』에서 그는 자신의 스승인 플라톤이 예술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한다. 그는 이데아를 인정하지도 않았지만, 설사 어떠한 진리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시는 오히려 역사보다도 더 철학적이고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고 말했다. 역사는 개별적인 것을 이야기하지만 시는 하나의 유기적인 통일을 이루고 있는 사건을 필연적인 인과 관계의 테두리 내에서 재현함으로써 보편적 진리를 드러낸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가는 분명히 모방(mimesis)자이지만 또한 창조자인 것이다. 『시학』은 희극과 서사시보다도 비극을 제일의 예술로서 비중 있게 다뤄내고 그 비극의 기능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플라톤은 감정을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보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감정을 제거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았기에 적절히 해소해야 한다고 보았다. 해소되어야 할 감정은 바로 디오니소스적 감정이며 이를 통해 극은 아름다움을 담보하면서도 감정을 안전하게 해소하는 도덕적 기능, 즉 배설(catharsis)을 가능케 한다. 그는 말한다, 모든 인간은 선인이거나 악인이라고. 그렇기에 그들은 갈등할 수밖에 없다. 그 갈등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들은 선인은 선인에게 동조하고 악인은 악인에게 동조하면서 자신들을 합리화하고 보호하며 살아왔다. 이러한 남들에게 자신을 투영하여 안정을 얻으려는 본성 즉 공감을 고대 그리스 비극작가들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이 이러한 인간들의 본질을 선한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 바로 비극이다. 그런데 여기서 더 나아가 이 말의 이면을 좀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선인이거나 악인이라는 말은 인간이 선하게 태어난다거나 악하게 태어난다는 말이 아니다. 선과 악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임의로 구분한, 그리스시대에서 인간 내면에 공존하고 있는 인간 본성 자체인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의 갈등은 외적갈등일 뿐만 아니라 끝없는 내적갈등인 것이다. 하지만 이 내적갈등 중에 선한 측면은 언제나 태양이 떠있는 밝은 낮 세상에서 그들의 의지를 마음껏 드러낼 수 있었다. 문제는 악하다고 여겨지는 측면이다. 인간에게 잠자고 있는, 결코 간과될 수 없는 동물적 본성은 언제나 억눌려있는 것이다.그것의 표출은 타인에게 해를 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억눌려있는 감정이 언제나 끝까지 억눌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을 해소할 수 있는 방향을 찾아야 했고 그것이 바로 비극인 것이다. 이제 니체의 어법으로 넘어오면 비극을 지켜보는 관객들은 단순히 주인공의 야만성에 자신을 내맡기고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에서 족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드러나는 인간과 삶에 대한, 의지에 대한 긍정을 느끼고 결국 그러한 주인공이 악으로 인해 파멸해가는 모습에서 카타르시스까지 느끼게 된다. 니체는 삶이란 이러한 충만함으로 가득차야 한다고 보았다.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적 사상을 많이 계승했지만, 결국 쇼펜하우어가 염세주의로 빠지는 것을 보고, 그것이 다시금 삶을 허무하게 만드는 소크라테스적임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다. 쇼펜하우어가 예술을 삶의 고통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환각제로서의 소극적 역할로 이해했다면 반대로 니체는 예술이 삶을 긍정하게 해주는 적극적 역할을 해야 한다고 했다. 비극을 필두로 이에 따라 예술은 필요에 의하여 개별적으로 선택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진리로 인해 죽는 것을 막기 위해 반드시 누려야할 선물로 격상된다. 고대 그리스비극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의견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금 재해석했다. 비극에서 제일로 중요한 것은 플롯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의견을 넘어서서 그는 비극이 관객에게 주고자 하는 쾌감 그 자체에 주목한다. 그럼으로써 비극의 형식을 넘어서서 머리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느껴지는 음악에 주목한다. 고대에 최초의 언어는 시였고 시는 바로 음악이었다. 음악과 언어는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뿐이 아니다. 춤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를 춤추게 하지 않는 음악은 진정한 의미의 음악이 아닐 것이다. 고상하게 앉아서 음악의 음계를 머리로 이해하고자 하는 자들은 결코 음악을 음악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 이면에 숨겨져 있는 심연에 결코 도달하지 못한다. 춤이라는 것은 또 무엇인가. 디오니소스적인 것에서 보자면 춤은 몸이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증거 그 자체이고 그 몸으로 살아가는 이 세계 자체에 대한 무한한 긍정인 것이다. 우리는 단 한순간도 멈춰있을 수 없는 존재이고 춤은 그러한 사실로서 부동의 절대자이고자 착각하는 자기기만적 인간을 침범하고 무너뜨리는 것이다. 그렇게 예술은 삶을 복 돋아준다.


니체의 후기 저서 『우상의 황혼』에서 니체는 예술을 형이상학의 측면이 아닌 생리학적인 측면으로 바라보며 힘에의 의지가 어떻게 예술로 드러나는지,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여 실천할 것인지에 주목한다. 그럼으로써 초기 『비극의 탄생』에서 디오니소스적인 세계에 속했던 도취라는 속성이 다시금 전면부에 등장한다. 이때의 도취는 아폴론적과 디오니소스적인 것 둘 다 해당하며 그 뜻은 바로 이렇다. 도취란 힘 상승의 느낌과 충만의 느낌과 완전성에 대한 느낌을 단순히 심리적인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육체의 혈관체계 근육체계 신경체계 등의 차원까지 확대하여 느끼는 흥분이자 생동감이다. 실제로 도취한 인간은 그의 심적, 육체적 감각을 극대화시켜서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상태를 투사하여 변용시킨다. 변용시킨 대상에 대한 체험은 곧 넘쳐흐르는 힘에 대한 자신의 완전성 체험이고 니체는 바로 이것을 진정한 예술 활동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인간은 아폴론적으로는 환영을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되어 건축을 하며 반면에 디오니소스적으로는 아펙트들이 총체적으로 흥분하는 분출상태로 변신하여 구분 이전의 세계의 근원을 엿보게 된다. 개체성이 벗어지는 부분은 노예적인 개별성의 상실이 아니라, 개별성의 승화이다. 모든 개인은 자신이면서 동시에 모든 인간을 대표하는 하나의 자신을 마주한다. 따라서 이제 니체의 예술철학은 사실주의에 입각한 예술을 부정하고, 동시에 예술을 위한 예술인 좁은 의미의 유미주의조차 비판하며 개인의 해석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의미의 삶의 미적 체험으로 예술을 이해한다. 예술은 삶이 선택하는 여러 것들 중 하나가 아니라, 삶이 힘에의 의지를 긍정하고 니체가 말하는 ‘초인’으로서 등장할 때 비로소 이해되는 삶의 동의어인 것이다. 예술은 더 이상 삶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삶과 하나이며 비극이 되었든 건축이 되었든 그 어떤 것이 되었든 결국 그것의 궁극의 목적은 힘에의 의지의 긍정이며, 다시 말하자면 ‘힘에의 의지’의 긍정이 ‘현상계의 드러남’ 그 자체인 것이다.


니체의 사상이 현대에는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 현대에는 사상의 자유를 보장받고, 저마다 자신의 삶의 방향을 선택할 수 있기에 세상을 직관적으로 느끼기도 하고 이론적으로 배우기도 하면서 삶의 균형을 찾기가 이전보다 쉬운 듯이 보인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못한 듯하다. 오히려 현대는 니체가 위기를 느꼈던 19세기보다 더욱 위험한 상태이다. 현대의 과학만능주의와 배금주의의 힘은 가히 막강하다. 이것들에 가려져서 디오니소스적인 것은커녕 아폴론적인 것조차 모두 졸렬하게 무너져가는 듯하다. 예술도 상업적으로 소모되기 십상이고 그에 저항하는 순수예술도 그들만의 공간을 구성하고 높은 성벽을 세워 스스로를 지키기에 급급하다. 그 곳에는 고상하고자 하는 허영심 가득한 인간들이 득실거리겠지만 그 중 도취-삶의 긍정을 느끼는 자들이 얼마나 있겠는가. 먹고 사는 것만이 지상 최대의 과제가 된 이 세상에서 예술은 마치 사치품인양 여겨진다.


우리가 접하는 예술은 크고 작은 차이가 있지만 도통 우리 곁에 있는 것 같지가 않다. 실제로 아름다움라고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우후죽순 올라가는 아파트와 계획된 도시 속 이 삭막한 공간속에서 디오니소스적 엑스타시에 이르는 것처럼 고조되기란 거의 불가능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뿐만은 아니다. 니체라면 분명 이렇게 말할 것이다. 언제나 삶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를 결정하는 것의 주체는 자기 자신이다. 현실에서 도피하여 이상을 추구한다던가, 개체화의 벽을 허물고 우주와 합일하는 수준의 도취가 아니라 단순히 현실을 잊고자 취하는 수준이라면 그는 염세주의자고 삶의 긍정을 파괴하는 병균과 같은 자다. 즉 우리가 삶을 긍정하지 않는다면 모든 예술은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일지라도 우리에게 어느 정도 동떨어진 느낌을 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제 더 이상 예술은 삶과 괴리되어 인간에게 선택되어지는 대상이여서는 안 된다. 우리가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아름다움은 철저히 주관적인 체험이고 또 그래야만 한다. 그래서 예술적 대상이 촉발시키는 모든 아폴론적 디오니소스적 쾌감들과 의지들이 인간과 자기 자신을 관통시킨다는 것, 무한히 고양되는 힘을 제공한다는 것을 느끼며 자신이 서있는 곳을 미술관으로, 자기 자신을 예술품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뱃살이 접힌 채 책상 앞에 앉아서 엿보는 모든 세상들은 이제 부정되어야 한다. 세상은 이해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체험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해석해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본질은 존재가 아니라 행위이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행해지고 있는 모든 예술들이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가장 중요한 것을 상기시키는 하나의 계기가 되어야한다. 그래야 비로소 예술은 단순한 유흥이나 여가의 수준을 넘어선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삶을 예술로 승화시켜야한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 비행기를 타고 그 멀리까지 가서 예술적인 건축물들을 보러 가는가. 그것을 마주대한다는 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선사하기에? 아름다움이 주는 쾌감, 바로 고양되는 삶의 의지 아니던가. 긍정하는 삶은 아름답고, 그 아름다움으로 재차 긍정한다. 이것이 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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