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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명인 Aug 09. 2016

내가 없는 곳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인연들에 대하여

무더운 여름, 굳이 되새기지 않아도 온 몸과 마음으로 전해진다. 작렬하는 태양 아래에서 애지중지 닦은 하루의 산뜻한 시작은 무기력하게 젖어간다. 동시에 권태로운 하루에 대한 경멸감에 시달린다.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 고개가 들어지지 않는다.


지하철이 오고있다. 오늘도 앉기는 여전히 글렀다. 머쓱하게 돌린 고개는 제자리를 찾아오다 약냉방칸임을 확인한다. 서둘러 칸을 옮긴다. 서있기 가장 좋은 자리에 선다. 어느정도 숨을 고른다. 고개를 든다. 이쁜 사람들이 눈을 사로잡는다. 무심한 척 핸드폰을 쳐다본다. 그러다가는 역을 확인하는 척 또 힐끔. 자신도 모르게 어느새 가벼워진 발 뒤꿈치.


얼마나 지났을까. 그 시간과 공간의 주인공이 되어주던 친구들은 내렸다. 익명의 사람들이 수시로 내리고 타기를 반복하니, 별것도 아닌 일에 미묘한 상실감을 삼킨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잠깐이나마 나에게 의미를 부여받았던 존재는 이제 이 공간에는 없다. 이름도 나이도 사는 곳도 모르는 미지의 소녀와 나의 일생의 한번뿐일지도 모르는 교차점이 이런 볼품없는 출근길 지하철의 번호 모를 칸이라니.


문득 지나간 인연에 대한 생각에 이르렀다. 서로가 서로에게 대체 불가능한 무언가로 존재하던 시절들. 부분이 전체를 이루지 않았고 그 사람이란 더이상 쪼갤 수 없는 최소 단위의 전체가 모든 부분을 압도하던 그 시절들. 지구 저편에서 누군가에게는 소중했을 사람들의 죽음보다도 그녀의 삐침 하나가 내 마음을 더 참담하게 만들던 시절들.


그녀는 이제 없다. 지하철에서 만난 낯선 소녀들처럼. 그녀는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을 것이지만 나와의 교차점은 끝났기에. 마찬가지로 그 이름 모를 소녀도 이제 없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이기에. 혹여나 다시 만나더라도 기억할 수 없을 것이기에. 파편적인 교차점들은 무한한 우주만이 품을 뿐.


하루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스쳐 지나가고 있을까. 내 안에서 수십년을 교차해온 부모님과 몇년을 함께한 친구들과 지금은 없는 그녀부터 통학길에 나를 잠시나마 사로잡던 소녀들과 찰나의 순간 일초의 시선의 머무름도 권태로웠던 수많은 익명의 인간들에게 이르기까지.


교차점에 경중은 있겠지만 결국 만남은 정적인 것이 아닌 흘러가는 바람임을 실감한다. 영원한 것은 없었다. 이제는 멀어져버린 수많은 인연들, 아직 내 곁에 있는 수많은 인연들, 앞으로 나와 교차하게 될 설레는 수많은 인연들이 바람이 불듯 내 옆을 지나가 때로는 따갑게 생채기를 만들기도 하고 포근하게 감싸기도 하고 미처 느끼기도 전에 사라지기도 한다. 바람을 가둘 수는 없었다. 바람은 내가 어쩔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저 바람 속에서 나로서 연속성을 가지며 흘러가는 것 뿐. 나 또한 누군가에게는 바람이겠지.


솔직히 고백하건데 나를 지나가버린 바람이 여전히 흘러가고 있을 것임은 나역시 그러하기에 자명한 사실이지만 그것이 나에게 무슨 의미를 갖는지는 모르겠다. 누군가의 의미이고 싶은 나의 바램은 시간과 공간의 영속성에서는 무참히 짓이겨질 뿐이니까.


그렇게 하루하루 내 안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죽는다. 나를 사랑하던 그녀가 내 안에서 죽던 날, 실제로 그녀는 살아있다는 괴리감에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 하지만 결국에는 그녀를 내 마음에서 영원히 안식시킴으로써 나 또한 안식을 얻는 것 말고는 달리 방도가 없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날 죽었던 하나의 존재가 더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녀와 계속 함께였다면 자연스례 생겨나 그녀와 나의 사랑을 증명했을 불멸하는 우리 둘의 정체성. 오직 특정한 교차점으로만 생겨나는 우주의 위대한 사건. 유일무이한 하나의 새로운 생명. 우리의 미래의 아이. 그 아이는 태어나기도 전에 죽었다. 그리고 아마 영원히 태어날 수 없을 것이다.
삶과 죽음, 만남과 이별이 소용돌이 치는구나.


내 안에서 죽는 것은 타자 뿐만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타자와 관계맺으며 형성되었던 과거의 나 자신도 포함한다. 감히 비유하건대 산모의 출산의 고통이 그렇듯이 스스로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는 건 무척이나 고통스럽다. 생명을 낳는 존재 뿐만 아니라 생명 그 자체에게도 힘든 과정이었을 그것이 이제는 물리력을 넘어서서 정신적으로 내 안에서 일어나고있다. 끝이 보이지 않았던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을 지난 인고의 시간들. 그러나 이제 희미하게나마 빛이 보인다. 새로운 생명이 새로운 자유가 꿈틀거리는 것을 느낀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새에게 하나의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 데미안 中 -



지나간 것들이여 안녕.

다가오는 것들이여 안녕.


우주만이 이 모든것을 기억하고 이해해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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