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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퀼티 Jul 31. 2016

여름의 틈, 아지랑이

눈을 뜨자마자 그 말이 기억이 날 줄이야. 몸도 꿉꿉하다. 끈적한 몸을 일으켰다. 여름다운 소리가 났다. 물 한 잔 마시자. 요즘은 하루가 언제 시작되고 끝이 나는지 잘 모르겠다. 바쁘고 정신 없다 뭐 이런 이야기는 아니고 시간의 흐름을 종잡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나의 지금과 과거의 시간들, 남들의 시간들. 이런 것들이 자꾸 어긋나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 때로 누군가와 어떤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그이와 내가 같은 곳에 있는지 자각하기 위해 고개를 치켜드는 일이 생긴다. 나쁜 버릇이다.

정수기 물은 적당히 시원한 법이 없다. 일어날 때부터 속에 뭐가 가득한 기분이 들었는데 너무 차갑다. 요즘 속이 안 좋다. 무엇을 먹어도 개운한 법이 없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먹기에는 헛헛하다. 몸보다 마음이 문제인가 싶다. 병원에서는 위궤양일수도 있다고 하던데 그럴 듯한 얘기를 해준 것 같다. 처방해준 약을 먹고는 있는데 좀처럼 효과가 없다. 그래도 적당히 넘어가기로 하자. 막상 물 한 잔 먹고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발이 길을 잃었다. 일어는 났는데 무엇을 할까. 그런데 어제 그 술자리는 정말 있었던 것일까?

혹시 모를 일이다. 없었던 일이 기억에 남는 일은 없기는 하지만. 추측해보건대 시간의 순서가 뒤섞여 버린 것은 아닌지. 기억이 낯설다. 아니면 내가 과하게 의미를 부여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 순간의 공기와 감촉, 습한 소리들. 술을 많이 마시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어느 날과 어젯밤의 기억이 뒤섞여 그이의 향기가 떠오른다는 것은 당혹스럽기도, 그리웁기도 하였다. 나는 지나간 것들에 대해서는 내 편리한 사실만 기억하므로 그이의 얼굴이 생각이 안난다. 그래서인지 어젯밤 다른 이의 얼굴에서 어느 날의 그이가 말했던 말소리가 들렸을 때. 쓴웃음이 나왔다. 어느 쪽이 꿈인지 다시 생각해도 곤란하다.

나는 오후 2시를 좋아한다. 반쯤 열린 창문에서 빛의 그림자가 내리 앉으면 피어오르는 먼지들. 어차피 내 눈으로 보이지 않는 것들은 어쩔 수 없다. 포기하는 마음에서 평온이 왔다. 나는 수많은 나의 번민들을 이 시간에 두고 가곤 했다. 이 햇살에는 영원이라 불리는 낭만이 깃들여 있다. 의자에 걸터앉아 그것을 보고있으니 나의 당혹스러움, 해야 하는 일들. 그것이 떠오른다. 햇빛을 보며 나의 끝을 괴로워하기에는 좋은 때가 아니었다. 오늘은 창연하게 빛나고 있었고 나는 일을 하러 나가야했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낯선 사람을 좋아해요.”
“글쎄요. 나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싫던데요.”



생각해보니 그런 이야기였던 것 같다. 처음 그의 마음을 들여다보기를 포기한 것은. 누가 먼저 말하고 누가 뒤이어 말했는지도 기억이 없다. 같은 말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기억 역시 시간의 흐름이 가늠이 안되는 것들 중 하나이다. 나는 낯선 사람을 좋아한다. 내 부끄러움이 많은 친구처럼 인간에 낙담하지 않아서 그럴지도 모른다. 어설픈 그 거리감. 그것은 얕은 개울 위에 얹어 있는 돌무리다. 조금의 용기만 내면 건너갈 수 있는. 하지만 길을 가다 넘어진다 할지라도 태양은 따사로우니 넉넉히 걸어 다닐 만 한 것이다. 그래도 낯선 사람을 좋아한다는 말은 대체로 무례하지 않을까. 내가 그에게 어떤 존재일지 스스로 묻게 되니까. 질문거리를 안겨주는 사람은 피곤하다.

나도 요조를 좋아했다. 그의 호수 같은 고독함을 안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일단은 밥을 하자. 며칠 속이 불편하니까 편의점에서 죽을 많이 사다 먹었다. 그런데 오히려 채워지지 않는 공허감만 더 느껴질 뿐이었다. 은유가 아니고 실제로 그러했다. 솥에 쌀을 채우고 물로 헹군다. 이 과정은 어떤 신성함이 있다. 물을 부으면 바로 묻은 때들이 씻겨 나오고 그것을 비운다. 그러다 무심코 손가락 사이로 흘려버린 쌀알들. 사소한 것들이다. 그렇지 않기도 하지만.

취사를 누르고 잠시 앉았다. 오늘은 어딘가 나사가 빠진 것 같다. 생각이 좀처럼 거두어 지는 법이 없다. 아마 어제의 그이 때문이겠지. 어째서 나는 그이에게 한 마디를 더 건네지 못했을까. 예전의 그이에겐 했을 법한 이야기가 입밖으로 나오려는 순간. 목에 뭐라도 걸린 것처럼 꿀꺽 말을 삼키고 말았다. 그리고는 한참을 머뭇거렸다.



그제 흘러간 대화에서 이유없이 서글픈 마음이 들었던 것은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모두 나의 세계로 초대할 수 없음이 피부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오래전 나는 이 문장을 적었다. 그때는 나의 세계가 꽤 완고하게 그 자리에 머무를 줄 알았다. 그래서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사라지는 수많은 존재들에 대해 슬퍼할 수 있었다. 나의 의지에 대한 지나친 숭배와 지배욕. 그것이 내 곁에 낭자하던 시절이었다. 그때와 달리 지금 나는 낯선 존재가 좋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나의 마음이 온전히 평안한가, 밥알이 뱃속에 가득해도 허하지는 않은가. 그런 질문을 스스로 하던 차에 나는 그이와 마주하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 내 말. 아무것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죠?”
“그럼요. 눈치를 많이 보는 사람들은 알 수 있어요.”



그 때 그이의 눈빛, 시선의 방향, 입 벌린 정도, 콧날의 깊이. 그 모든 것이 완벽하게 나의 마음을 무너뜨렸다. 어린 소년은 그이의 한마디에 떠나간 사람의 뒷모습에 온 마음을 걸 용기를 낼 것이다. 그것이 구원이라면 구원이겠지. 하지만 나는 되돌아갈 수 없는 거대한 절벽을 느낀다. 나는 요조가 될 수 없다. 어느새 나는 요시코를 그런대로 사랑하거나 소년을 무시하는 방법을 배웠다. 나의 소년은 그리움을 영원히 안은 채 늙어가겠지만, 어제의 나는 소년을 냉소적으로 바라보기만 하였다. 잃어버린 낭만의 조각들. 그것을 줍기에 내 허리는 너무 굽었을지도 모른다.

간단히 계란국을 끓였다. 밥과 국을 퍼서 찬가지들을 펼치니 묘한 안정감이 든다. 출근하기까지 멀지 않았다. 여전한 햇빛. 평온한 풍경이다. 단 하나의 스산함도 없다.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어찌하여 나는 개울을 건너지 못하고 농담만 건네었던 것일까. 알아채주기를 바라던 눈빛에 나는 묘한 미소만 남겼다. 절벽을 단숨에 뛰어넘어 나 역시 너의 구원이 되어주겠다던 그때의 소년을 그려본다. 어딘가 속이 아팠다. 평범한 식단임에도 위가 안좋다. 애석하다. 적당히 치워야겠다.



“전부터 느꼈던 거지만 이름이 아주 예뻐요. 잘 어울려요.”
“참나. 그런 말은 아무런 의미도 없어요.”

나는 겸연쩍었다.

“그래요. 어쩔 수 없죠.”
“아니 그런 말 말고! 내게 의미가 있는 말을 좀 해줘요.”
“나는 오늘만 기분 좋을 이야기밖에 몰라요. 그럴듯한 이야기는 곳곳에 있잖아요.”
“그건 또 그래. 하지만 그곳에선 왜 이렇게 숨쉬기가 어려운지 모르겠어요.”

그이의 옅은 미소. 입꼬리에 조명이라도 걸린 듯 화사했다.

“요즘 나도 속이 안좋아요. 뭐가 계속 채워져 있어서 . 나랑 시더운 이야기나 하다가 들어가요. 하나도 배부르지 않을테니까.”
"그것도 좋지만... 그래도 좀 더 재미있는게 있을지도 몰라요. 저 갈래요!”
“그래요. 재밌는 시간 보내요. 안녕.”
“안녕! 밥 잘 챙겨 먹어요. 배가 고픈지 부른지도 모르면서. 속 아픈거 그거 다 잘난 척하느라 그래요.”


일리가 있는 말이다. 속의 헛헛함은 잘 가시지도 않았다. 밥상을 치우는 내내 그이의 입꼬리를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마치 어제의 대화처럼. 하지만. 마음 속에서 생각을 떠나보내려는 순간, 턱 하고 걸리는 지점이 분명히. 분명하게 느껴져왔다. 갑자기 나의 온전한 공간이 낯설게 느껴졌다. 이전에도 감지되었던 불안함과 위태로움. 이것을 즐기던 시절도 있을 터였다. 나의 삶이 지금과 또 다르게 흘러갈 것이라는 확신이 맴돌았다.

옷을 갈아 입었다. 곧 나가야한다. 짐을 주섬주섬 챙긴다. 출근하면 해야 할 일들의 목록을 정리한다. 균열은 가볍지 않은 것이지만 어쩌면 그대로 그 위에 먼지가 쌓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의 한 발짝은 왜이렇게 내딛기가 힘든것인가. 소년은 왜 목소리를 잃었는가. 이 외침은 오래전에 힘을 다했다. 나에게는 돌아갈 오후 2시가 있다. 백일몽에 휩싸여 바다속으로 뛰어들기에 나에게는 어떤 빛이 없다. 몇 번을 돌려 생각했던 말을 다시금 쓸쓸히 깨닫고 나는 신발을 신는다.



그런 생각들은 더 할 것도, 더 할 도리도 없다.



오래전 떠올렸던 그 말을 복기하며, 나는 아까 쌀알을 씻던 때를 생각한다. 물이 차오르고 하얀색 물감이 퍼지기 시작한다. 존재를 오래전에 잃어버린 쌀겨들. 그것들이 떠오른다. 나는 정성스레 온 쌀들을 손으로 품다가 일거에 씻겨내려 버린다.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오는 멀쩡한 쌀알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바라보며 슬퍼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속은 허전해도. 나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선다. 뜨거운 온기. 그런데 그 때.



"좀있다 죽이라도 같이 먹어요. 이따 연락할게요."



그러고선 끊었다. 내 말을 할 새도 없었다. 계단을 내려간다. 여름이다. 어찌할까. 괜히 서성거렸다. 거리엔 아지랑이가 피었다. 햇살이 깊고 또 넓다. 일렁이는 무언가. 균열의 틈에서 그 무언가가 고개를 내밀어 내게 인사를 건네고, 웅크리고 있던 소년이 그 틈을 뛰어넘어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나는 그대로 멈춰서 고개를 들어본다.


하늘엔 구름도 없었다. 나를 가려주는 모든 것들이 사라졌다. 어쩐지 청량한 기분. 물론 다시 밤은 찾아올 것이고 여름도 지나가리란 생각이 들었다. 촌스러운 사고의 흐름이다. 허상이지만 아지랑이도 눈 앞에 있는데 말이다. 마음속으로 좀 웃으며 나는 다시 아무렇지 않은 듯 발걸음을 옮겼다. 아무렇지 않지만, 어쩐지 허기가 졌다.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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