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책갈피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명인 Sep 13. 2021

산다는 것의 의미

고통 앞에 평등

작동을 잘하는 볼펜은 볼펜의 작동 원리에 대한 의문을 낳지 않는다. 볼펜은 스며들며 존재 이유만 드러낸다. 반면에 고장 난 볼펜은 그 작동 원리와 존재 이유에 대해 계속 의문을 낳는다.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내 삶이 의문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은 내가 고장 났고, 작동 원리와 존재 이유를 잃어버리고 방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같이 또다시 삶이 흔들리는 날에는 나는 허무하게도 맨 처음의 질문으로 또다시 돌아간다.


우주는 왜 존재하는가.

인간은 왜 존재하는가.

나는 왜 존재하는가.


이러한 질문은 오늘 같은 날에는 더 퍼져나간다.


고통은 무엇이고 기쁨은 무엇인가

소유는 무엇이고 상실은 무엇인가

만남은 무엇이고 이별은 무엇인가

사랑과 도덕, 욕구와 감정과 이성은 다 뭐란 말인가


오늘 같은 날에는 부정적인 생각만 흐른다.

잔혹한 세상에 인간은 그 의미를 갖기엔 너무 나약하다.

의미를 부여하려는 행위는 살기 위한 발버둥이지만,

허무한 죽음과 통렬한 고통 앞에

그 의미를 찾는 것은 너무나 눈물겹다. 의미가 없다.


깊은 수렁에 빠질 때, 우리는 궁극의 요람을 찾는다.

가령 부모나 신에게 기댄다. 살려주세요.

그러나 오늘날같이 부모가 부모 같지 않고

이혼을 통해 아이의 존재를 손쉽게 부정해버리는 시대에 부모로부터 뭘 기대할 수 있을까.


신은 또 어떤가. 세계에 일어나는 무수한 참사를 보면 신의 존재를 의문케 한다.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지구 상에서 그보다 더 냉혈한 존재는 없을 것이다. 혹자는 신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다고 한다. 바로 그 조건, 신에 대한 바람에도 무언가 자격을 갖춰야 한다는 그 조건이 세계가 잔인하다는 것을 곧바로 증명한다.


그런 조건을 갖추는 행위가 우리가 기댈 수 있는 최후의 보루라면, 그리고 그 보루마저 무너지기 십상이라면, 우리는 어디에서 그 희망을 찾아야 할까.


희망은 없다. 절망뿐이다. 죽는 게 무서워 살고, 죽는 걸 잊기에 산다. 모든 고통에는 의미가 없다. 그냥 아프다. 너무 아프고 괴롭다. 슬프다.


나약한 인간은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고 비를 긍정해보지만,

비가 계속 오면 땅이 무너지고 휩쓸린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래도 인생이 즐거웠다고 말할 수 있는지 지켜보겠다.


헛된 희망을 버리자.

죽음만이 옳고 정의다.

그러니 삶이란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이다.

삶이란 죽음의 부산물일 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심신일원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