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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팥 Oct 28. 2020

옆집 할머니가 '오빠'를 불렀을 때

마음을 안아주는 생각들

좀 오래전 주택에 살 때 겪었던 이야기다. 집 근처를 오가 트럭에 야채를 실어 판매하던 할아버지 있었다. 야채 할아버지가 오는 날이면 '야채, 야채 팔아요. 양파, 배추, 감자 고구마도 있어요.' 하는 말이 확성기를 통해 동네에 울려 퍼지곤 했다.
한날은 빨래를 걷으러 마당에 나갔는데 지나가는 야채 트럭 소리를 들은 옆집 할머니가 집에서 호다닥 나오시더니 평소와는 전혀 다른 애교 섞인 목소리로, '오빠!오~빠!'하고 트럭 할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는 그 소리를 듣고는 옆집을 지나치려다 말고 트럭을 세우더니 이내 할머니를 따라 들어갔다. 난 마당에서 우두커니 서서 마치 불륜의 현장이라도 목격한 듯, 어안이 벙벙해졌다.


'혹시 할머니랑 야채 할아버지랑 연인 사이? 아니면... 어머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지금...'


야채 할아버지는 내가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혼자 사시는 분일 수도 있고, 옆집 할머니는 어차피 할아버지 돌아가진 지가 오래되셨으니 할머니가 연애를 하시던 말던, 나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때 난 연애는 젊은 사람들의 전유물이라고만 생각했나 보다. 할머니의 애교 섞인 '오빠'소리는 참 뭐랄까... 이상했다.
그렇게 한 달, 야채 할아버지가 동네를 돌아다니는 날이면 할머니는 여지없이 집 앞으로 달려 나와 '오빠아~!'를 부르셨다. 시간이 지나도 할머니의 그 '오빠'라는 말은 내 귀에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옆집 할머니가 만두를 빚으셨다며 우리 집에 가져오셨다. 하, 지금이 기회다 싶어 나는 호기롭게 할머니께 오빠의 정체에 대해 여쭤보았다.
 


'할머니, 근데 저번에 야채 할아버지 오시니까 '오빠'라고 부르시던데... 아시는 분이세요?'
 
'응, 우리 오빠야. '
 
'네? 오빠요?'
 
'응. 우리 친오빠. 둘째 오빠야 내가 셋 째고.'


'아... 아... 그러셨구나.'


'오빠가 이 동네 도는 날이면 우리 집에 와서 같이 점심 먹고 그러지. 아유, 애기 엄마도 우리 오빠한테 야채 좀 많이 사 먹어. 저 밑에 마트에서만 사지 말고. 알았지?'


'아, 네 그럼요. 꼭 그렇게 할게요.'
 
할머니의 대답을 듣는 순간 나는 너무 창피해서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다. 지난 시간 할머니를 보았던 나의 시선은 뭐였단 말인가. 만일 내 의심이 맞았다고 해도 아니 할머니가 연애를 하던, 그야말로 불륜을 맺던 나랑 무슨 관계가 있으며 설령 그것이 사실이라 한들 그건 할머니의 자유고 내가 상관할 일도 아니었다.

할머니가 오빠를 오빠라고 하는 것이 왜 내 귀엔 이상하게 들렸을까. 그럼 할머니가 오빠 대신 라고 부르셨어야 내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이렇거나 저렇거나 이상한 건 옆집 할머니가 아닌 바로 나였다.


그 일을 계기로 나는 내가 가진 편견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해준 것 없이 '나이'에 대해 요구하는 것들 대해서도.
나는 그동안 얼마나 작은 생각의 틀에 갇혀 살았던 것인가. 아이는 이래야 하고 엄마는 저래야 하고. 노인은 그러면 안되고 하는 것들로 작은 뇌 속을 꽉꽉 채워 편견이란 상자 안에 꽁꽁 가두고 살았던 나 자신이 무척이나 한심했다.

내로남불이라고, 누군가 내 나이를 아주 제대로 보고 '아줌마!'이렇게 부르는데도 난 얼마나 기분 나빠했던가. 보이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하는 이에겐 화가 났으면서 아무 죄도 없는 옆집 할머니를 마치 일일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바라보며 호들갑을 떨고 저급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던 것이다. 내 좁은 마음으로, 스스로 만든 편견이란 안경으로  두 눈을 가리고 말이다.

그래서 옆집 할머니의 오빠 사건 이후로 나는 좀 더 세상을 편견 없이, 섣부른 오해와 그릇된 판단을 멀리하고 살아야겠다 다짐했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는 오래된 그 말을 떠올리며, 할머니께 너무나 죄송했던, 할머니께 한 대 얻어맞아도 시원찮을 실수를 범했던 경험 가슴속 깊이 새기고서.


 


사진/ '태풍이 지나가고' 스틸 컷

사진과 본문 내용은 관계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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