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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팥 Nov 02. 2020

겨울마다 꺼내는 전기장판은 언니를 생각나게 한다.

마음을 안아주는 생각들

11월이 시작되면 해마다 전기장판을 꺼낸다. 나는 몸이 엄청나게 찬 사람이어서 전기장판 없이 잠을 자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잠을 자기 30분 전에 전기장판을 켜놓고 샤워를 한 뒤, 따뜻하게 데워진 이불속으로 쏙 들어가는 그 맛! 따스함에 온 몸이 녹아내릴 것 같은 그 기분은, 하루 동안 수고한 나를 위해 하는 겨울만 가능한 신성한 의식다.
전기장판에 들어갈 때마다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우리 언니다. 전기장판처럼 따스하고 포한 기억 때문이냐고? 아니. 절대 그렇지 않다. 지금의 언니는 언제나 나를 살뜰히 보살펴 주는 엄마 같은 존재지만, 내 기억 속 유년 시절의 우리 언니는 악마 그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무렵까지 다섯 식구가 살던 5층짜리 단층 아파트는 방이 두 개뿐이었다. 언니와 오빠는 고등학생이었는데도 각자 방을 갖지 못하는 처지였다. 연년생인 언니와 오빠는 함께 잘 수 없는 다 큰애들이니까 엄마가 고심 끝에 방법 하나를 생각했다. 아빠와 오빠는 안방에서, 건너 방에서는 언니와 내가 잠을 자는 것이었다. 그럼 엄마는? 엄마는 거실에서 전기장판을 켜고 혼자 잠을 주무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부엌이 붙어있는 거실에서 혼자 잠을 청했을 엄마가 얼마나 짠한지 모른다. 애들은 다 컸는데 방은 부족하고, 그런데도 좁은 집에서 붙어 지내려니 연년생인 언니와 오빠는 허구한 날 소리를 지르고 싸워댔다. 그 시절, 아마도 간절히 이사를 원했던 사람은, 우리 삼 남매가 아닌 엄마였을 것이다. 그래서 돌이켜보면 엄마도 짠하긴 했지만 아니다. 그 겨울엔 내가 제일 불쌍했다.

언니와 내가 잠을 자는 방에는 옷장을 놓을 공간이 부족했다. 엄마는 우리 이불과 옷을 놓는 옷장을 베란다에 놓았는데, 한겨울이면 그 옷장이 정말 꽁얼어있었다. 밤이 되어 언니와 내가 잠을 자려고 옷장에서 이불을 꺼내 바닥에 깔면 이불이 얼어서 얼마나 차가웠는지. 언니는 내게 이불을 내려다보며 '누워!'라고 명령했고 언니보다 한참 어리고 어리숙한 나는 울상을 하고서는 누울 수밖에 없었다. 언니는 내 몸 위로 차가운 이불 하나를 더 덮어서는, 날 김밥처럼 돌돌 말아 이불에 대고 몇 번이나 굴렸다. 내 몸의 온기로 인해 이불이 따뜻해질 때까지. 그렇게 이불의 찬기운이 없어지면 언니가 이불로 쏙 들어왔다. 몸이 차가워진 나는 거실로 후다닥 달려 나가 엄마의 전기장판에 쏙 들어가 몸을 녹였다. 추웠던 몸이 스르르 녹는 기분. 겨울이 오면, 전기장판을 꺼낼 무렵이면 난 꼭 그 기억이 떠오른다. 꼬맹이가 얼마나 그것이 서러웠으면 마흔이 넘어서까지  생각이 날까. 직도 추운 겨울이 되면 언니에게 그 추억을 끄집어 내 말을 한다.
 
언니 때문에 내가 얼마나 춥고 서러웠는지 알아!
 
그럼 언니가 엄청 겸연쩍은 듯 웃으며 말을 한다. 진짜 진짜 미안했다.

이제 몇십 년이 흘러 언니도 나도 그때의 우리 나이 아이들을 키운다. 아이들이 투닥거리며 싸움박질을 하고 서로에게 못된 말을 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자라날 때에 비하면 그건 그다지 힘들거나 나쁜 행동도 아닌 거 같다. 어렵고 힘든 시절에 한두 방울의 눈물로 유년을 보내던 우리도 이렇게 잘 컸는데 말이야, 그 못된 우리 언니도 이렇게 착해졌고 직장 다니고 돈 벌고 애들 키우는 슈퍼우먼으로 자라나지 않았어? 우린 가끔 애들 이야기를 하며 서로의 대견함을 칭찬한다. 나한테 지독히도 못되게 굴던 언니는 이제 나이 든 동생의 비타민을 챙기고 안부를 걱정하는, 나보다 한참 큰 어른이다.

전기장판을 꺼내며 해마다 겨울이 되면 언니와의 어렵고 추웠던 추억 하나를 꺼내 따뜻함에 폭 녹이며 생각을 한다. 그때, 악마 같았던 언니는 중년의 천사가 되었고 서로의 흰머리를 걱정하는 자매는 렇게 함께 늙어간다.   



사진/ 영화 '우리 집'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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