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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팥 May 04. 2021

상처의 기억은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

마음을 안아주는 생각들

내겐 생각의 꼬리표를 달듯 종종 그리고 자꾸만 떠올려지는 이름과 사건이 있다. 어제는 생각이 나지 않았지만 오늘 아침 버스 정류장을 다섯 번쯤 지나쳤을 때 떠오르기도 고, 지하철에서 음악을 듣다가 튀어나오기도 한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용수철 같은 그 생각을 내 의지로 붙잡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혹자는 자신의 무의식 저 편으로 생각을 넘기기도 하여 떠올리지 않고 싶은 일이나 사람은 묻어버리기도 한다는데, 불행히도 나에게 그러한 능력은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공포 영화의 한 장면처럼, 기억의 무덤에서 나쁜 생각은 좀비처럼 되살아나 내 뒤를 쫓다가 어느 순간 다시 잠들어 버리기도 한다. 매 순간 깨어 나를 괴롭히는 것은 아니지만,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몰라 당황스러울 때도 많다.

그럴 때면 떠올리는 그림이 하나 있다. 프리다 칼로의 '상처 입은 사슴'이란 그림이다. 나는 사춘기를 아주 늦게 겪은 모양이었는지, 스무 살에서부터 한 이삼 년쯤 굉장히 마음이 힘들었다. 학교와 부모님, 친구들 사이에 어디 한 군데 마음 둘 곳이 없이 혼란스러웠다. 이십 년이 지나서야 내가 그때 왜 그렇게 힘들었는지 주변과 나 자신을 돌아보며 알게 되었다. 아, 그랬구나. 많이 상처 받았고 난 그런 사람이었구나. 비로소 나를 이해하고 나서야 나는 조금 홀가분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게 일어났던 사건과 사람들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생각은 좀처럼 없어지지도 않았고 상처가 다 아물어 흔적이 없어진 것도 아니었다. 프리다 칼로의 '상처 입은 사슴'을 보면 내게 새겨진 상처들이 떠오른다.


그녀는 자신에게 닥쳤던 시련과 고난, 사고를 다 껴안고 살아가며 이 그림을 그렸다. 자신의 얼굴을 하고 있는 사슴의 몸엔 화살에 찔린 상처들이 가득하다. 하지만 태연하게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얼굴은 좀 당황스럽다. 아프다고 울상을 짓거나 고통스러워 보이지가 않으니까. 몸에 화살이 그렇게 박혔다면, 쓰러져야 마땅한데도 사슴은 위풍당당하게도 서 있다. 곧 쓰러질 것 같지도 않다. 그건 프리다 칼로가 자신의 상처를 마주하는 방식이었다. 아프고 힘들고 처절했지만, 그래도 그녀는 아주 굳건히, 자신을 바라본다.
 
언젠가부터 나에게 불쑥 떠오르는 생각은 언젠가부터 그냥 흘러가게 두어버린다. 한정거장 한정거장, 마치 버스 정류장을 지나치듯, 어느 날은 하나씩 하나씩 생각들도 그 정류장에 두고 내리기도 한다. 그것들은 그러나 다시 나를 따라오고 또 내 안으로 가둬지곤 한다. 그러나 괜찮다. 일어났던 일들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내가 죽은 것이 아니니, 이렇게 멀쩡히 잘 살아 숨을 쉬고 있으니까 그렇다. 나를 괴롭히는 생각들은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그렇다.

프리다 칼로처럼, 그 모든 상처들은 내게 화살처럼 꽂혀있다. 하지만 뭐 어떠하리. 그래도 삶을 바라보고 마주하는 그녀처럼 나도 용기를 내어 본다. 난 지금 몹시도 생생하게도 살아있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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