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지인이 윌라 오디오북의 이용권을 선물해 주었다. 티브이에서 김혜수 배우가 광고하는 것만 보았지 사실 오디오북을 들어본 적은 없던 터라 '이거 꼭 들어야 하나?'싶기도 했다. 하지만 처음 겪어본 오디오 북의 위력은 대단했다. 부러 시간을 내지 않아도 사나흘이면 책 한 권을 뚝딱. 이건 무슨 마법 같기도 했다. 출퇴근 시간이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 마법. 팔목이 아프게 핸드폰을 들고 쇼핑이나 뉴스 카테고리를 지겹게 뒤지지 않아도 된다니. 게다가 성우의 실감 나는 목소리 연기도 큰 재미를 더해준다. 적고 나니 내가 윌라 오디오북 홍보대사 같기도 한데 그건 절대 아니고, 아무튼 그렇게 나는 오디오북에 입문하게 되었다.
오디오북을 듣다 보니 문득 대학교 때 들었던 드라마학 개론 수업시간이 생각이 났다. '똠방 각하'라는 드라마를 쓰셨던 김원석 교수님의 수업시간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일드라마를 그토록 좋아하는 이유는 농경사회라는 민족적 특성에 기인한다는 내용이었다. 해가 일찍 지는 캄캄한 농촌의 저녁이면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 듣던 그 구전이야기를 듣고 듣고 또 듣던 우리나라 사람들의 특성을 드라마에 접목하여 이해하고 관찰했던 것이 참 재미있어서 아직도 기억에 남는 수업이다.
그러나 그 수업으로부터 20년이 훌쩍 지난 요즘에도 우린 다들 이야기를 좋아한다. 굳이 농경사회나 민족 특성을 운운하지 않아도 될 만큼 전 세계는 이야기에 열광한다. 오징어 게임을 전 세계인이 다 함께 시청할 만큼. 그럼 이 문제는 인간의 어느 특성에 기인하는 것일까? 오랜만에 나의 호기심이 하늘을 찌른다. 아마도 다음 오디오 북을 들을 때는 인문이나 인류학을 좀 찾아봐야 할 듯도 싶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냄새는 잊지 않고 싶다. 도서관의 퀴퀴한 그 냄새, 새 책에서 나는 갓 구운 책 냄새, 오래된 책장을 넘길 때 손 끝에 느껴지는 종이의 까슬거린 그 질감까지도. 아마도 계속 오디오북을 듣게 되면 그것들을 잊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든다. 그래서 뭐든 과하게 빠지는 것은 위험하겠지. 난 종이책도 참 사랑하니까.
오디오북을 들으며옛 생각과 현재의 생각이 몇 겹의 층을 이루어 머릿속을 채운다. 지금의 편리가 없던 예전의 나도 나고, 빛나는 기술 문명을 누리는 현재의 나도, 바로 변함없는 나 자신이다. 추억과 경험이 그렇게 내 나이와 함께 무르익어간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또 경계하며. 이렇게 또 한 해가 저물어가는 때에도 난 새로움을 경험하게 되어 기쁘다. 무언가 한 가지를 더 얻으며 나이를 들어가는 것 같아 뿌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