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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팥 Sep 14. 2020

엄마를 위한 보리차

우리 좋은 마음만 해요

내가 여섯 살 때, 엄마는 신문 배달을 했다. 그땐 조간신문과 석간신문이 있던 시절이었는데 엄마는 오후가 되면 신문 배급소에서 신문을 받아 4시 무렵 담당 동네에 신문을 돌리는 부업을 했었다.

아빠의 월급은 제때 나오는 적이 없었다. 악기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던 우리 아빠는 노래도 잘하고 기타도 잘 쳤다. 하지만 돈을 버는데 그다지 소질이 없는 분이었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한, 엄마는 아빠를 참 끔찍하게 사랑했다. 늘 아빠의 스텐 밥그릇에 소복하게 흰 밥을 담아 아랫목 이불 아래 아빠의 밥을 담아 두었다. 연탄보일러를 때던 시절이긴 했어도 나름 주공아파트의 신식 집이었지만, 시골에서 나고 자란 엄마는 남편의 밥을 위해 그 방법을 고수했다.

아빠가 퇴근하고 집에 들어오면 엄마는 작은 밥상에 아빠만의 진수성찬을 차려왔다. 작은 뚝배기에 아빠만을 위해 끓인 계란찜. 우리들의 저녁 밥상에는 오르지 않은 것이었다. 막내인 나는 총각김치 한 덩이면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운다고 엄마는 날 대견해했지만, 아빠의 계란찜은 늘 소담스럽고 먹음직해서 탐이 났다.


막둥이 이리 와.


아빠가 밥을 드시다 말고 날 부르면 입을 크게 벌리고 옆에 앉아 계란찜을 받아먹었다. 그러다 엄마가 눈을 흘기면 입을 오므리고 멀찍이 떨어져 앉아 티브이를 봤다. 엄마는 허겁지겁 밥을 먹는 남편의 모습을 보며 흐뭇해했다. 하지만 그런 날이 늘 있었던 건 아니다.


그런데, 월급은 언제 나와?


아빠가 맛있게 밥을 드시는 중에 엄마의 그 소리가 들리면, 아빠는 가차 없이 밥상을 엎었다. 엄마는 한숨을 쉬며 쭈그리고 앉아 엎어진 밥상을 주웠다. 언니가 행주를 가져다주었다. 분에 이기지 못한 아빠는 밖으로 나가 담배를 태웠다.

자주 그런 일이 있고 나자 엄마는 부업을 결심했다. 집에서 아이 셋 키우는 걸 최고의 자랑으로 알던 엄마에겐 아주 큰 결심이었다.



여기에 가만히 앉아있어, 엄마 이거만 금방 돌리고 올게. 꼭 여기에 있어야 해. 누구 따라가면 절대로 안되고. 알았지?


한여름, 엄마와 함께 잘 모르는 동네 길을 걷고 걸어 언덕배기에 있는 슈퍼 앞에 갔다. 엄마는 나에게 쭈쭈바 하나를 쥐어주며 신신당부를 했다. 아이스크림 하나를 다 먹고 돌 하나를 주워 아스팔트 위에 그림을 그렸다. 그래도 엄마가 오지 않아 풀을 뜯어 돌로 짓이겼다. 그 푸릇한 냄새. 아스팔트의 열기 바닥으로 떨어진 내 땀방울이 돌로 짓이긴 풀에 섞였다.

신문을 다 돌린 엄마가 멀리서 나를 불렀다. 고작 서른여덟의, 지금의 나보다 어린 여자였던 우리 엄마가 반갑게 나를 부르며 달려왔다. 여섯 살 나의 눈에 그녀 참 불쌍하고 가여웠다.

그런데 엄마는 언제부턴가 나를 데리고 다니는 것을 그만두었다. 더 이상 나를 데리고 나가지 않는 엄마를 집에서 기다렸다. 엄마는 신문 배달이 끝나면 헐레벌떡 들어와 냉장고에서 보리차를 마셨다. 오렌지 주스 유리병에 담긴 보리차반절없어지도록.

어느 날, 엄마를 기다리다 냉장고 문을 열었는데 보리차가 많이 남아있지 않았다. 엄마가 오면 이 물을 다 마실 텐데. 그럼 엄마는 물을 끓여야 하겠지, 나는 주전자를 꺼냈다. 낑낑거리며 주전자에 물을 받고 엄마가 하던 대로 보리를 꺼냈다. 엄마의 주먹으로 한주먹을 넣었나, 두 주먹을 넣었나. 가물가물 했다. 작은 아이의 주먹으로 보리를 한 움큼 집어넣고 또 한 움큼을 더 넣었다. 물이 팔팔 끓었다. 엄마가 오면 이걸 보고 얼마나 좋아할까. 내 마음도 함께 보글보글 끓어올랐다.

엄마가 신문을 다 돌리고 들어와 보리차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다 가스레인지 위에 내가 끓여놓은 보리차를 봤다. 엄마가 입가에 흐르는 보리차를 닦으며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러고는 아직 뜨거운 보리차를 컵에 따라 부어 호호 불며 마셨다. 엄마의 뺨 위로 땀이 주르륵 흘렀지만, 눈에서 눈물이 흘렀던 것도 같았다. 더운 여름이면 그래서 난 차가운 보리차보다 뜨거운 보리차가 생각이 난다. 엄마를 위해 끓였던 그 보리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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