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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팥 Sep 16. 2020

선을 지키는 여자

우리 좋은 마음만 해요

년 전 중국어를 배우고 싶어서 한 일 년 정도 열심히 중국어 공부를 했었다. 오랜 세월 한자에 대한 콤플렉스와 열망이 있었기도 했고, 당시의 중국어 배우기 열풍에 세상 모든 사람들이 중국어를 배워야 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때 배웠던 중국어로 인해 지식이 1mm쯤은 업그레이드되었다고 느껴지니 헛으로 배운 것은 아니었다.

중국어 학원에 다니며 같은  또래의 학우를 만났는데 성격이 참 특이했다. 아무내가 살아생전 처음 보는 캐릭터였다. 그녀는 자신의 일이 아니면 절대, 절대로 남의 일에 참견하는 법이 없었다. 아니, 참견 보다도 뭐랄까. 관심 자체를 두지 않았다.

예를 들어, 누군가 갑자기 내린 비에 옷이 젖어 학원에 들어오면 수강생들은 '어머, 비 와요?' 또는 '비 맞아서 어떡해'라는 걱정을 한두 마디씩 던지기 마련이지만, 그녀는 웬만해선  학원에 들어오는 사람을 쳐다보지도, 안부의 인사도 건네지 않았다.

한 번은 학원 수업이 끝나고 그녀를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눈이 나쁜 그녀나를 알아보지 못. 내가 다가가 '여기서 뭐해요?' 하며 다정하게 말을 건넸는데, 한 5초쯤 나를 멀뚱멀뚱 쳐다보더니 '아. 안녕하세요.' 하고는 자기 갈 길을 가버렸다.

어찌 보면 뭐 저렇게 딱딱한 사람이 있어, 아니면 좀 예의가 없나 싶게 느껴지던 그녀였지만 6개월이라는 시간을 함께 지내면서 알고 보니 그녀는 먹을 것을 가져와 함께 나누어 주기도 하고 예쁜 펜이 있으면 서너 개를 사서 앞뒤로 앉은 사람들에게 선물도 하는 상냥함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게 몇 달을 지켜본 결과 그녀에게는 꼭 지키는 '선'이 있었는데 그것은 '사람과의 경계선'이었다. 다른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스스로 알아달라 표현하는 것이 아니면 절대 먼저 묻지도 궁금해하지도 않는 사람. 그녀는 늘 사람 사이의 그 지점을 참 중요하게 생각하는 듯했다.




오늘 00 씨 옷차림이 화사하네요. 무슨 좋은 일 있어요?

없어요.


00 씨 남자 친구 있어요?

있어도 없어도 말 안 할 건데요.


00 씨 어젯밤에 분식집에서 봤는데  녁밥을 왜 그렇게 늦게 드셨어요?

제 저녁 식사 시간 신경 지 마세요.


처음엔 좀 삭막하게까지 느껴지는 그녀의 화법에 같은 반 수강생들은 얼굴이 화끈해지는 느낌도 들었지만, 점점 그녀와의 이런 대화가 익숙해질수록 나는 어딘지 모르게 편안한 그녀의 장점을 배울 수 있었다.

가족도 아닌데 식사시간은 굳이 물을 필요가 없으며  친한 친구도 아닌데 애인이 있는 걸 묻는 것도 실례가 될 수 있다는. 남의 옷차림 그렇게 관심이 간다면 그저 '오늘 참 예쁘다'는 칭찬 한마디만 던지면 될 일이었다.

사람들은 참 남의 일에 관심이 많다. 그래서 필요 이상으로 참견하다 다툼도 일어나기 십상이다. 서운하고 삐치고 화나고. 여자들 사이에 그런 일이 얼마나 많기도 많던가. 하지만 그녀와는 그럴 일이 아예 없었다. 좋은 것은 그냥 나눠주면 그만이고 숨기고 싶은 일은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편안함이 있었다.

그리 길지 않은 만남이었지만 그녀를 만난 후로 나는 배운 것이 있었다. 보이지 않는 우리 사이의 '선'을 보려 애쓰는 것이다.  비록 공부를 하는 공간에서 만났기에 서로를 알아갈 시간이 적고 성향이 달랐던 그녀와는 더 친해지지 못했지만.

그래서 누군가에게 필요 이상의 관심과 흥미가 생기면 난 또 그 사람의 선을 밟지 않기 위해 잠시 중국어 학원에서 만났던 그녀가 되어본다. 의 이런 관심이 그 사람에게 혹여 지나치지 않을까? 곤란하게 만드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필요 없는 오지랖을 부려 얼굴이 잠시 화끈해지는 창피함을 당했더라도 그것으로 인해 배운 것이 더 컸다. 잠시 만난 인연이었지만 내게는 참 좋은 것을 남겨 준 그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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