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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온 Dec 21. 2016

결국. 그래 봤자. 우리는.

영화의 마지막이란. 'Requiem for a Dream'.

주의1: 본 문서에는 영화 내용 누설이 있으며, 청소년 관람 불가 판정을 받은 영화를 다룹니다.

주의2: 영화를 보지 못한 분들은 여기서 해당 영상을 한번 보고 오시는 것을 권장합니다.


영어 토론에는 한 가지 종류만 있는 것이 아니다. Team Policy, Lincoln-Douglas 등 여러 가지 종류의 토론 방식들이 존재하는데, 각 종류별로 진행 방식도 참여 멤버도 다르다. 그중 British Parliamentary Debate에서는 마지막에 각 팀의 Whip이라는 멤버가 자신의 팀의 주장을 위한 최후 변론을 한다. 내가 보기에는 해당 토론 방식에서 가장 흥미로운 순간 중 하나다. 이 멤버가 하는 말 하나로 토론의 판도가 바뀔 수 도 있기 때문이다.


영화도 그렇다. 영화의 마지막이란 어마 무시한 무게감을 지닌다. 감독은 두 시간짜리의 긴 여정을 10분 남짓한 시간 내에 요약하고, 마무리 짓는다. 지금까지 보여줬던 흐름에 따라 무난하게 마무리할 수도, 혹은 그 흐름을 뒤엎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잘 만든 마지막이란 무엇일까. 그 질문에 답을 제시해 줄 법한 영화 세 편을 골랐다. 그중 첫 영화는 '레퀴엠 포 어 드림'(Darren Aronofsky 감독, 런타임 101분). 4명의 마약 중독자들의 이야기를 풀어낸 이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는 이 영화의 모든 것을 대변한다.

(마지막 장면을 보지 않고 읽으시기 보다는 한 번 보는 것을 권장합니다. YouTube)

좌측 상단에는 사라, 우측 상단에는 해리, 좌측 하단에는 타이론, 우측 하단에는 마리온. 모두 마약으로 밑바닥으로 끌려 내려진 모습이다.

사라 골드팝(Ellen Burstyn)과 그녀의 아들 해리 골드팝(Jared Leto), 해리의 여자 친구 마리온 실버(Jennifer Connely), 해리의 친구 타이론 C 러브(Marlon Wayans)는 결국 마약으로 밑바닥을 찍는다. 사라는 다이어트 약(암페타민), 해리와 마리온과 타이론은 헤로인에 중독되어 있다. 각자 이루고자 하는 것을 위해 시작했던 약은, 결국 모든 것을 앗아간다. 사라는 정신 착란증이 심해져 정신 병동으로 보내져 전기 충격 치료를 앞두며, 해리는 지속된 주사 투약으로 인해 썩은 팔을 절단받기 위해 병원에 보내지고, 타이론은 감옥에서 인종 차별적 간부 밑에서 육체노동을 수행하며, 마리온은 마약을 구하기 위해 매춘 알선 업자가 주최한 난교 파티에 참석한다.


여기서부터 감독의 마술이 시작된다.


이들 모두 다른 동기를 가지고 다른 삶을 살아왔지만 결국에는 동일한 이유로 몰락한다. 약으로 모든 것을 잃어가는 이 과정을 Darren Aronofsky 감독은 어떻게 표현해 내는지 살펴보자.

4명의 주인공 모두에게 흩뿌려지는 빛. 장소와 빛의 종류도 다르지만 결국 어둠 속에서 의지하던 이들을 심판하는 빛이다.

사라는 들것에 실려 이동되고, 해리와 타이론은 감옥에서 노동 적합성을 평가받는다. 마리온은 난교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는다. 이때 각자의 시야를 지나가는 빛들. 그 빛이 병원의 조명이던, 감독관의 손전등이던, 파티 참석자들의 조명이든 간에 모두 어둠(약)에 의지하던 4명의 주인공들을 드러내는, 심판의 빛이다. 그리고 그 빛은, 그들이 도달한 절망의 끝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4명의 주인공 모두의 세상이 말 그대로 '흔들리기 시작한다'. 인간으로써 가질 수 있었던 '자유 의지'란 없어진 밑바닥 인생의 정의를 보여준다.

이들의 세상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사라는 전기 충격 요법 치료를 받고, 해리는 정신을 잃고 실려가고, 타이론은 걸쭉한 죽을 저어주고 있고, 마리온은 성 노리개로 전락한다. 감독은 4명 모두의 시각을 번갈아 가면서 보여준다. 충격 후에 뒤틀리는 사라의 몸을 따라서 흔들리는 시야와, 어지럽게 흘러가기만 하는 해리의 시야, 극한의 육체노동에서 떨리는 타이론의 시야, 그리고 난잡한 성관계를 벌이게 된 마리온이 보는 시야. 이 모두가 빠르고, 리듬감 있는 컷을 통해 나열된다. 모두의 세상이 송두리째 흔들리기 시작한다. 약에 취해 자신의 치료받는 사실도 모른 채 치료 동의서에 사인을 한 사라와,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자신의 팔을 절단받게 되는 해리, 기본적인 인권도 무시당한 체 착취당하는 타이론, 파티 참석자들의 주문에 응해야 하는 마리온. 이들 모두 '자유 의지' 없이 약이 가져온 운명에 따라 흘러간다.

그들이 놓여진 상황에 대한 변명도, 변론도 하지 못하는 이들. 시각적으로도, 내용 상으로도 이들 모두 말할 기회를 박탈 당한다.

그리고 모두 이런 상황에 대한 변명도, 변론도 하지 못한다.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브레이크가 없음을 뻔히 알면서도 그들은 차에 탑승했다. 감독은 이 내용을 시각적으로 강화시킨다. 4명 모두 입을 틀어막는 것들이 있다. 이게 바로 영화이기에 가능한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단순히 이야기 전개를 통해 내용을 전달하는 것뿐만 아니라, 시청각적인 보조 표현을 통해 그 내용을 강조하는 것. 감독은 이 강점을 영화의 끝에서 효과적으로 사용했다.

마치 태아와 같이, 이들에게 남은 것은 없다. 그들이 몸을 움크린 모습을 감독은 포착한다.

결국 이들은 모든 것을 잃는다. 사라는 한 때 아름다웠던 모습을 잃고 극심한 스트레스로 노화된 몸을 이끌고 등장한다. 해리는 병원에서 한쪽 팔을 잃고 깨어나며, 타이론은 육체노동 후 피로에 절은 몸을 침대에 겨우 눕힌다. 마리온은 혹사당한 몸으로 한 때 둘이 있었던 방에 혼자 들어온다. 이들 모두 처음에 지키고자 했던 것들을 모두 잃은 상태로 그려진다. 마치 태아와 같이, 이들에게 남은 것은 없다.


마지막 씬은 사라가 해리와 함께 나오고 싶었던 TV쇼가 나온다. 여기서는 사라는 아름다우며, 입고 싶었던 빨간 드레스를 우아하게 걸치고 등장한다. 해리 또한 성공한 사업가로 등장한다. 하지만 결국, 그래 봤자 환상일 뿐이다. 그들이 꿈꿨던 휘황찬란한 미래는 이 헛된 바보상자 속의 이야기처럼 이뤄질 수 없었던 것이다. Darren Aronofsky 감독은 시청각적으로 이 모든 내용을 마무리 짓는다. 단순히 등장인물들이 허무하게 바닥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통해 알려줄 수 있는 것을, 정말로 이들이 모든 것을 잃었음을, 결국 모든 것들이 흔들리다 무너져 내려갔음을 감독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통해 우리의 화면에 들이민다.


'지금까지 보느라 좀 불편했지? 근데 이건 외면하면 안 돼. 결국. 그래 봤자. 이게 현실이거든.'라고 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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