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마지막이란. '설국열차'.
주의1: 본 문서에는 영화 내용 누설이 있습니다.
주의2: 영화를 보지 못한 분들은 한번 보고 오시는 것을 권장합니다.
제목을 작성하면서 혼자 웃었다. 끝이 존재하는 목표의 한계,라고 주 제목을 정했으면서 부 제목으로 영화의 마지막을 논하고 있다니, 조금은 아이러니하다. 하지만 좋은 영화의 마무리는 그러한 한계를 극복하게 해 준다. 두 시간 가량 되는 길면서 짧은 그 시간 뒤의 '여운'을 만들어 주는 영화의 끝. 그 끝을 탁월하게 보여준 영화 '레퀴엠 포 어 드림'을 앞서 소개했었다. (결국. 그래 봤자. 우리는. 참고) 해당 작품은 영화라는 매체가 지닌 강점을 올바르게 응용해, 영화의 전반적 메시지를 압축해서 담아냈다. 그에 비해 '설국열차'(봉준호 감독, 런타임 126분)의 마무리는 어떨까. 열차의 끝에 도달한 커티스(Chris Evans)는 결국 자신이 믿어 왔던 모든 것들이 거짓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런 하나의 신념의 틀을 부수는 끝. '설국열차'의 피날레는 영화 내에서 지속적으로 강조시킨 메타포를 뒤튼다.
We go forward. 우린 앞으로 간다.
'설국열차'는 이해하기 어려운 영화가 아니다. 사실 말하고자 하는 바가 너무 명백하다. 계급 시스템. 그리고 그를 엎고자 하는 뒷칸 탑승객들. 이렇게나 보여주고자 하는 메시지가 명백하기에, 그걸 어떻게 보여주는지가 이 영화의 강점으로 작용한다.
커티스와 함께하는 뒷칸 탑승객들은 앞칸으로 가려고 한다. 그리고 그 선택지는 항상 화면 상에서 좌(左) 아니면 우(右)로 표현된다. 이 영화는 단순하다. 직선적이며 반복적이다. 앞 칸으로 나아가고, 난관을 파하고, 다시 한번 앞 칸으로 나아가는 이야기가 반복된다. 이건 뒷칸 탑승객들이 공유하는 신념과도 일치한다. 앞칸으로 가면 나아질 삶. 그러기에 그들은 중간에 멈추지 않는다. 중간 칸에서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창문을 마주했을 때 그들의 반응을 보면,
Still cold. 아직도 얼어붙어 있구나.
Dead. 모든 게 죽어있고.
이들은 밖의 가능성을 보지 않는다. 아니, 보지만 이해하지 못한다. 평생 창문 없이 살아온 뒷칸 탑승객들은 수직적인 탈출을 고려할 여지가 없다. 그들이 보는 탈출은 오직 열차의 노선에 맞춰진 탈출뿐. 그들의 반란의 한계가 드러나는 부분이다. 아무리 앞으로 나아가려 해 봤자, 결국 탑승객들은 모두 열차(시스템) 안에서 존재한다. 그러기에 밖을 바라보는 인물인 남궁민수(송강호)와 그의 딸 요나(고아성)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식료품 칸에 도착한 뒷칸 탑승객들이 모두 과일과 채소를 따먹기에 정신이 없을 때 남궁민수는 딸에게 흙이 무엇인지 설명해 주는데,
A train baby wouldn't know about this.
기차에서 태어난 넌 모르겠지.
I grew up walking over it.
아빠는 이걸 밟으면서 자랐어.
This is located under the snow.
이게 눈 밑에 있는 거야.
이 둘은 말 그대로 기차로부터 수직적인 탈출을 꿈꾼다. 커티스는 결국 열차의 맨 앞칸에 도착하고 나서 절망한다. 앞칸도 뒷칸과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결국 우리 모두 (열차의 개발자인 윌포드(Ed Harris)의 말을 빌리자면) 이 빌어먹을 열차 내에 갇혀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설국열차'의 결말은 더 큰 의미를 지닌다. 시스템 내의 한계를 인지하고, 진정한 구원은 저 밖에 있다는 사실의 표현. 제 아무리 발버둥 쳐 봤자, 시스템 내에서는 항상 착취하는 자와 착취당하는 자는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 (열차의 구조상 어떻게 사람을 배치해도 앞에 있는 사람과, 뒤에 있는 사람은 존재한다.) 그러기에 열차는 탈선해야만 한다는 메시지를 봉준호 감독은 '방향성'으로 이야기한다. 어떻게 보면 현실성이 없는 결말일 수 있다. 기차에서만 자라온 소녀와 반복 노동을 하도록 세뇌된 아이가 어떻게 혹한에서 살아남겠는가.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감독이 전달하고자 하는 큰 메시지다. 감독은 영화 내에서 거듭 강조된 뒷칸 탑승객들이 공유했던 신념, 직선적 전진의 메타포의 한계를 피력하고 그걸 뒤엎는다. 또 다른 메타포인 수직적 탈출로 말이다. 왜냐하면,
끝이 존재하는 목표를 이루었을 때, 무기력해지는 게 인간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