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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온 Dec 29. 2016

커피와 클림트의 키스.

보다 더 아름다웠을 것들에게.

예전에 내가 커피를 마시는 것을 엄청 싫어하던 여자 친구가 사준 캔 커피가 있다. 그날도 내가 부탁해서 안 사 올 거라고 궁시렁거리면서 사 왔던 커피였다. 애당초 커피를 마시는 사람이 아니니까 어떤 커피가 좋을지 잘 알리가 있나. 분명 사면서 엄청 고민했을 거다. 이 커피가 좋을지, 저 커피가 좋을지. 그러면서 속으로는 커피 마시면 안 되는데, 중얼거리면서.


그 날 여자 친구가 건네준 커피에는 쪽지가 붙어 있었다. 작고 아기자기한 글씨와 그녀의 트레이드마크가 끝에 작게 그려져 있었다. 하던 공부를 멈추고 쪽지를 읽었다. '... 커피는 잘 모르니까 캔이 예쁜 걸로 사 왔어!..."라고 하길래 커피 캔을 봤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가 그려진 캔이었다. 잠시 바라보다가 뚜껑을 따서 마셨다. 맛은 그냥 그렇네, 캔이 예쁜만큼 맛이 괜찮았더라면.이라고 생각했다.


다 마시고 캔을 내려놓고 캔에 그려진 그림을 보고 있다가, 공교롭네. 하면서 웃었다. 한 때 엄청 싫어했던 그림이었는데. 어디를 가던지 다 보이는 그림들 중 하나였으니까 말이다. 머그잔에도 있고, 포스터에도 있고, 패러디에도 있고, 너무 과도하게 보여서 빛을 잃은 듯한, 그저 그런 지겨운 그림이었다. 하지만 그 그림을 실제로 마주했을 때 다리의 힘이 풀렸던 기억이 났다. 벨베데르 궁전의 위층에서 내 눈높이보다 조금 높은 곳에서 따뜻한 조명을 받으며 빛나던 그림은 내가 지금까지 봐 왔던 평평하고, 눅눅한 생산물들과는 달랐다. 따뜻하고, 정교하고, 정갈하고. 그저 아름다웠다. 그 앞에서 몇십 분을 서성이던. 그런 기억이 났다.


오늘 편의점에 커피를 사러 갔다. 항상 마시던 스타벅스 커피가 괜히 먹고 싶지 않아서 편의점에 들어가 커피 코너로 걸어 들어갔다. 그 당시 그녀가 사줬던 커피는 이벤트로 만들어진 제품이었는지, 진열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나름 커피를 마시는 사람인데 편의점 진열대 앞에 서니까 무슨 커피가 어떤 맛인지 몰라 한참을 고민했다. 그러다 그냥 무난하고 단순한 디자인의 캔을 골라서 갔다. 뭐야 결국 나도 캔 커피 고를 줄은 모르네,라고 생각하면서 계산을 마치고 거리로 나왔다.


거리에는 어젯밤 내린 눈 때문에 나무들이 얇은 흰옷을 걸치고 있었다. 조금 추워서, 방금 산 커피를 따서 마셨다. 생각보다 맛이 별로네, 그때 그녀가 골라줬던 게 더 맛있었던 것 같은데.라고 생각했다. 괜스레 눈물이 고여 하늘을 봤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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