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진 컵으로 마시는 예술 커피

[구잘트, 굿즈로 읽는 아트] 일리 x 오노 요코

by 아보퓨레




'일리 x 오노 요코' 아트 컬렉션


깨진 컵으로 마시는 예술 커피


블라인드 미각 테스트에 참여한 적이 있다. 한 체험형 전시의 프로그램으로 음료 맛을 구분하는 테스트였는데, 친구들 사이에서 미식가로 불리던 나였기에 자신 만만하게 테스트에 임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콜라와 사이다도 제대로 구분을 못하는 혀를 가지고 있었을 줄이야. 이런 미련한 미각을 가진 나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프레소를 마실 때면 자신 있게 일리(illy)를 찾는 편이다. 오랜 시간 다져온 맛에 대한 브랜드의 철학도 중요한 이유이지만, 그보다 일리라는 브랜드가 예술에 대해 진심이라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일리 아트 컬렉션'이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예술가와 펼치는 컬래버레이션이 커피 맛에 예술적인 향을 더해준다고 해야 할까. 커피는 맛으로만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커피를 마시는 것이 문화 행동양식의 일부가 된 지금 시대에는 나와 같은 이유로 커피를 고르는 것도 아주 이상한 방식은 아닐 것 같다.


자신의 아트 콜라보 제품을 감상하고 있는 오노 요코 ⓒ illy


이탈리아 출신의 커피 브랜드 일리는 맛뿐만 아니라 마케팅, 가격, 서비스 등 다양한 방법으로 도전해 오는 챌린저들 사이에서 프리미엄 이미지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매달 아트 컬래버레이션을 통해 출시하는 에스프레소 잔들은 일리의 견고함을 한층 더 강화시킨다. 그중 오노 요코와의 협업은 일리가 얼마나 예술에 진심인지를 잘 보여준다. 흥미로운 점은 일본의 여성 예술가와 펼친 협업의 결과물이 깨진 컵과 받침이라는 점이다. 깨진 잔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예술적 의미와는 별개로 저 잔에 커피를 마시면 왠지 조심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사실 이 에스프레소 잔은 진짜 깨진 잔이 아닌 일본 전통 도자기 수리 기법인 긴쓰기(kintsugi)를 디자인 콘셉트로 적용한 것이라고 한다.


(좌) 피카소, <게르니카>, 1937 - 스페인 내전의 비극을 다룬 작품이다. (우) 치유의 메세지를 담은 오노요코의 에스프레스 컵


총 일곱 세트로 구성된 컵과 잔에는 작가 오노 요코의 반전주의 메시지가 들어 있다. 컵들은 각각의 이유로 조각났는데, 그중 처음으로 깨진 잔은 스페인 게르니카로 향한다. 1937년 4월 26일, 스페인 내전 중 독일군 폭격기들의 대대적인 공습으로 인해 게르니카 주민의 삼분의 일 이상이 사망한 사건이 발생한다. 피카소가 작품 <게르니카>를 통해 전쟁의 참혹함을 비판했던 바로 이 사건을, 오늘날 오노 요코는 파손된 컵 조각을 담담하게 붙임으로써 치유한다. 부서진 컵 중에는 작가의 개인적인 아픔이 담겨 있는 것도 있다. 바로 그녀의 남편이자 비틀스의 멤버인 존 레넌의 죽음으로 세계가 사랑했던 음악가의 죽음이 그녀에게는 가장 슬픈 일이 아녔을까 싶다. 그녀는 이 아픔 또한 담담하게 이어 붙인다.


(좌) 존레논이 죽기 전 마지막으로 오노요코와 찍은 사진 (우) 오노요코는 존레논의 죽음 또한 컬렉션의 마지막에 담았다.


일곱 개의 컵 세트 중에는 깨지지 않은 컵도 있는데 '이 컵은 당신의 보호 아래 깨지지 않을 거예요(This cup will never be broken as it will be under your protection)'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마지막 컵을 깨지 않는 것은 우리들에게 남겨진 숙제가 아닐까. 폭력과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지향하는 오노 요코의 메시지가 담긴 커피잔을 보고 있으면 멋지게 큐레이팅 된 전시회를 보는 기분이든다. 세계적인 예술가와 이토록 멋진 콜라보를 해내는 일리, 커피는 잘 몰라도 너란 커피 브랜드를 사랑할 수밖에.



모두를 사로잡은 오노 요코의 'yes'


비틀스의 멤버 존 레넌은 오노 요코의 작품으로 인해 그녀에게 푹 빠지게 됐다고 한다. 일본 출신의 설치 미술가이자 행위 예술가인 그녀는 타이포그래피를 활용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작품을 자주 선보였는데 <ceiling painting>이라는 작품 또한 그러했다. 관객은 바닥에 놓여 있는 사다리를 올라 미리 설치된 돋보기를 통해 천장을 들여다본다. 천장에는 아주 작은 글씨로 'yes'라는 글자가 쓰여 있는데 존 레넌은 이를 사랑의 'yes'로 해석했던 것인지 그때부터 그녀의 위트와 긍정적인 메시지에 홀딱 반하게 되었다고 한다.


오노 요코, <ceiling painting>, 1966


이번엔 그녀의 행위 예술과 관련된 집단의 이야기를 해볼 텐데, 이해를 높이기 위해 반항적인 미술학도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는 과거를 답습하는 미술이 너무나도 답답하다. 사각의 캔버스와 정해진 재료도, 기존에 클래식이라고 믿어왔던 것들도 하나같이 그저 따라 하거나 답습하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고 느낀다. 반면에 누구나 의미 있는 것을 표현한다면 모두 예술가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좌) 톱으로 피아노를 썰고 있는 필립 코너 (우) 머리에 먹을 묻혀 그림을 그리는 백남준


그래서 톱으로 피아노를 썰어버리기도 하고, 4분 33초 동안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를 하지 않고 연주를 음악을 했다고 우기기도 했다. 때로는 머리에 먹을 묻혀 글을 쓰기도 했다. 이것이 바로 1960-70년대를 풍미했던 플럭서스(fluxus) 운동의 대표 사례다. 플럭서스 운동이 등장하며 미술을 학구적으로 바라보던 기존의 미술계는 충격을 받았지만, 미술을 몰랐던 이들은 미술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많은 예술가들이 표현하고자 하는 생각을 담아 다양한 퍼포먼스를 했는데, 오노 요코는 관람객들에게 가위를 쥐어주고 본인이 입고 있는 옷을 컷팅하게 했다. 사회적 연대나 성(性), 그리고 고독으로 인한 우주적 고통 등 다양한 의미를 다룬 작품이었다.


오노요코, <cut piece>, 1964


한 작가의 포트폴리오를 두 개의 대표작으로 단정 짓기란 쉽지 않다. 그리고 그것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변화하는 예술가라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오노 요코의 경우에도 과거 '조각내기(cut piece)'와 같은 전위적인 퍼포먼스를 통해 생각을 표현했지만, 나이와 함께 예술이 무르익으면서 조각난 것들은 한데 모아 붙이는 치유의 메시지를 담은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사실은 그녀의 작품이 언제나 우리의 눈과 귀를 사로잡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녀는 이 시대의 진정한 스타예술가니까.


최근에는 조각난 것들은 한데 모아 붙이는 치유의 메시지를 담는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사진출처


https://blog.naver.com/glebong/220643685407


https://madelinex.com/2016/11/07/yoko-ceiling-painting-yes/


https://matildebachino.wordpress.com/2018/10/16/dream-come-true-yoko-ono/


https://www.moma.org/collection/works/127636


http://guernicaremakings.com/guernica-and-witnessing-suffering/


일리카페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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