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마흔-810 상상

전통옹기장인 이진수氏 작품전

by Noname

지인의 아버님께서 고희 기념 개인전을 하셨다고 한다.


그 소식을 들은 내내, 나는 우리 아빠를 생각했다.


친할아버지는 옹기장이로 중요인간문화재96호가 되시고나서 몇년 뒤 작고하셨다.

그 뒤를 큰아버지께서 계승하셨지만, 사실 실제 옹기를 빚은건 우리 아빠였다.


아빠는 새하얀 피부에 다부진 근육질 몸을 갖고 계셨다.


할아버지께서는 옹기를 만들어 큰 수익을 내실 때도 함께 일하시는 분들과 그 수익을 똑같이 나누었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가 가진 토지를 마을 분들께 나누어 주시고, 돌아가실 즈음에는 옹기를 만드는 공장 근처 땅만이 남아있었다.


아빠는 손재주가 무척 좋으셨다. 무엇이든 뚝딱 만들어주셨고, 물레를 빚을 때면 네모나한 찰흙이 우아한 곡선을 그린 옹기로 만들어지곤 했다.


아주 어린 시절 우리집 앞에는 전통가마를 때우기 위한 목재며 단추가루 들이 많이 있었다.

3,000~4,000도까지 온도를 올리기 위해선 단추가루와 같은 것들이 많이 필요했다.

그 옆에는 정제되지 않은 흙무더기가 있었다.

우리는 자주 거기에서 예쁜 단추를 발굴하거나 흙무더기에 올라가 장난을 치곤 했다.


옹기를 만드는 '공장'내에는 양재물을 만드는 구덩이가 두개있었고, 예전에는 그 앞까지 바다였다던 공터에는 항아리가 가득 쌓여있었다.


그 옆에는 제대로 구워지지 않았어나 모양이 조금이라도 어긋난 항아리를 깨어버리는 항아리의 파편 더미가 있었다.


항아리 깨는 소리는 아직도 선명하게 내 기억에 남아있다.


손재주가 좋았던 아빠는 그분이 알고있는 내에서 여러가지 작품을 빚곤 하셨다.

그런 아빠의 영향을 받은 나는 심심하면 아빠에게 찰흙을 얻어와 이것저것 만들곤했다.


초등학교에 다닐때, 지점토 만들기가 있는 날이면 엄마는 찰흙을 떼어다 주시곤했는데

친구들의 하얀 점토가 부러워 볼 멘 소리를 하기도했었다.


언젠가는 용돈을 모아 하얀 점토를 사서 곰돌이를 만들어 물감으로 칠했던 적도 있다.


아빠는 64세의 젊은 나이에 다발성골수종을 4년 앓다가 돌아가셨다.

환갑잔치를 열어드리고 싶었지만 아플때는 잔치를 하는게 아니라는 풍습에 의해 환갑잔치도 해드리지 못했다.


우리 아빠의 성함 세글자는 옹기 어디에도 남을 수 없었다.


그런것에 아빠는 연연하지 않으셨다.

늘 휘파람을 불며, 가마를 땔때면 잠도 못주무시고, 가마불을 지키셨다.


새벽 1시에도 2시에도 4시에도 밤을 꼴딱 세우셔도 힘든 내색 하나 없으셨다.


한 여름 고된 일도 힘드실때면

'야, 상아야. 설탕물 한잔 타보고~' 하시며 내가 타 드린 설탕물을 한번에 들이키시곤 다시 휘파람을 부시며 일을 하러 가셨다.


나는 우리 할아버지도, 우리 아빠도 정말 정말 존경한다.


우리 아빠가 조금만 더 살아계셨다면,

아마 곧 고희를 맞이 하셨을텐데


전통옹기장인 이진수氏 작품전을 상상해본다.

그리고 내가 그토록 보고싶었던 할아버지점퍼에 흰머리가 성성한 아빠의 모습도


기술사가 된 뒤로는 아빠뻘의 분들과 일할 기회가 많다.

내가 특별히 그런 분들을 어려워하지 않고, 살갑게 굴며 어떨때는 어르신들 산행에도 따라가 사진을 찍어드리고 잘 지내는 건 그런 아빠에 대한 향수일지도 모른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런 멋진 어른을 봐와서인지 그렇지 못한 어른을 마주하게 되면 당혹스러웠던 전과는 달리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존재하고, 그들은 그들만의 사정으로 그럴 수 밖에없다는 걸 알게된 지금이다.


모든 사람들이 그 치열한 중에도 멋지고 아름다운 삶을 누리시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마흔-811 마음만은 가까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