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oname May 06. 2024

마흔-217 네 말대로 너는!

경계성 인격 장애 

작년 언젠가 이래저래 알아보다가 내 자신이 경계성 인격장애 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우울증이라기엔 어린 시절부터 내 감정을 굉장히 섬세하게 느낄 수 있었고, 인식이 가능했기 때문에 우울증을 겪는 사람들의 그것과는 너무 달랐다. 


그러니까 고등학생일 적에는 의식하고 변화하는 다중이라고 친구들이 표현했다. 


맞다. 나는 정확하게 모든걸 의식하고 행동하고, 의도를 담아서 말을 하는 편이다. 


그렇기에 늘 사람들의 말과 행동, 사소한 표정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하려고 들어서 매우 피곤한 삶을 살아왔다. 그 덕에 관계에서 유리한 면이 분명히 있기도 했다. 


코로나를 기점으로 그 에너지를 내 자신에게로 돌리고 있는 상태이다. 

근본적으로는 타인에게 관심이 없다. 단지 내 삶에 영향력을 미칠 경우 발현되는 특성이다. 


관계, 자아상, 기분, 행동의 불안정성과 거절당하고 버려질 가능성에 대한
과민성의 패턴이 만연함을 특징으로 하는 정신 건강 상태
- MSD 매뉴얼 발췌 -

그래서 나는 연애를 할 수 없는 상태인거다. 

대체로 많은 부분에서 명상과 운동을 통한 자기애의 회복을 통해 좋아졌지만, 

(내가 나를 키운다는 느낌으로 사랑하는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다.)

여전히 나는 불안함을 느낀다. 


어느 순간 갑자기 예전의 그 것과 같이 끔찍히 사랑하는 상대를 쓸데없는 이유로 미워하려고 들기도 한다. 


아직 존재하고 있는, 나의 인격체 중 하나 이다. 


종종 생각했다. 내가 다중인격인 건 아닐까. 

하지만 내가 다중인격처럼 전혀 다른 패턴으로 사람들을 대하고, 그 패턴이 시기에 따라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모두 달라진다는 걸 너무도 잘 인식하고 있으니 다중인격은 또 아니다. 


근본적으로 나의 성정은 악함에 있다. 

나는 악하다. 


그러나 그 악함을 인정한 만큼 사람들은 나의 선함을 본다. 


자신이 인정하지 않은 것들이 타인에게 관찰되게 마련이다. 


가령, 열등감을 숨기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열등해보인다. 


겸손하고 착한 사람은 자신이 그렇다는 걸 모르지만 사람들은 안다. 


그것과 같다. 


비열함을 인정하지 못한 사람에게서 사람들은 비열함을 본다. 


며칠 전 심리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한 친구가 '경계성인격장애'에 관련된 부분을 공부하다 말고 사진 찍어 보내줬다. 


우리는 이거 너 맞네, 나 맞네 해가며 좋아했다. 


얼마나 다행이야. 내가 어떤 상태인지 내 스스로 알아 낼 수 있다는게 

그리고 그건 사실 개선이 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경계성 인격장애가 발현된 사유는 뻔하다. 

남동생의 죽음과 엄마를 비롯한 가까운 사람들의 폭언 


그래서 이상형이 최근에는 죽지 않는 헐크로 바뀐 거다. 


근본적인 단절,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 


그래서 사람들을 종교를 갖는 걸까. 


삶이 살만하다고 느껴지자,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게 불편해졌다. 


사람들은 그래서 죽음을 외면했나보다. 


오히려 나는 죽음이 너무 무서워 죽음에 집착했던 것 같다. 


그야말로 그런 허세가 따로 없지. 


지금은?

죽음을 생각하면 무섭고, 슬프다. 괜찮고 싶은데 삶이 좋아지니까 그게 괜찮지가 않다. 


순간이라는 걸 경험했으면서도, 내 몸을 한번 더 쓰다듬어보게 된다. 

작가의 이전글 마흔-218 관계가 안정되기까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