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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나무 Jun 30. 2022

파리의 밤 9시

- 코로나 이후 첫 해외여행


14시간 비행기를 타고 드골공항에 내렸다. 사람들을 따라가 줄을 섰다. 유심 칩을 갈아 끼워 놓은 핸드폰에 전원을 켰다. 와이파이를 연결하려 했지만 같은 페이지만 몇 바퀴 맴돌고 있었다. 앞사람이 핸드폰으로 인터넷 기사를 보고 있길래 "와이파이 어떻게 연결?" 이런 느낌으로 말을 건넸다. 내 핸드폰 화면을 몇 번 톡톡 쳐주니 나에게도 인터넷 세상의 데이터가 내려앉았다. "땡큐! 땡큐"라고 말하며 나도 똑같이 했었는데 뭐지? 하는 느낌을 주고받았다. 심사대에 도착해 비행기표를 보여주니 흰 남방을 입은 금발 곱슬머리의 덩치 큰 여자분이 나를 보지 않고 어깨를 두어 번 들썩였다. 여긴 갈아타는 곳이라며 손가락으로 긴 줄의 시작 지점을 가리켰다. 카톡으로 출구를 못 찾고 있다고 기사께 메시지를 남긴다. 비행기가 내린 곳까지 거슬러 가는데 이미 짐을 부친 후에 갈아타는 비행기라는 걸 알게 되었다는 동포가 서 있다. 여행자보험 보상범위를 확인해보고 환승 비행기 출발하기 전에 받게 다시 가서 얘기해줬다. 여전히 줄 서 있는 사람은 많고 사고처리를 도와줄 만한 직원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나는 백팩 하나에 작은 옷가방이 전부였다. 갑자기 떠나게 된 여행이라 일정표도, 이동경로도, 맛집 목록, 가보고 싶은 곳, 해야 할 미션 등 여행이라면 의례이 있을 법한 것이 하나도 없다. 그것도 해외여행인데. 계획이 없으니 눈앞의 상황에 집중하게 되었다. 어디 갈 곳이 없으니 여기가 어딘지부터 찬찬히 보게 되었다. 그것이 이번의 계획 없던 여행에서 알게 된 것이다.



한인 택시 예약은 아무 정보 없이 낯선 곳에 도착한 나를 위한 배려였다. 한국인 기사분께 파리의 최근 상황을 듣고 궁금한 것들을 물어가며 잘 한 선택이었구나 확신했다. 백신 패스가 종료된 파리는 어디든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다. 공항을 벗어난 거리에는 마스크 쓴 사람을 찾아볼 수 없었다. 파리는 코로나가 끝나 보였다. 빵집 아무 곳이나 맛있고 잘 모르겠으면 식당 앞 칠판에 써진 오늘의 메뉴를 먹으면 된다는 것도 택시 기사분이 알려줬다. 파리 어디든 다 맛있는데 맛집 가재서 태우고 가보면 다 한국인들만 앉아 있는 곳이 무슨 파리 맛집이냐고 했다. 가방이 작은 걸 보며 여행할 줄 아는 것 같다고 해줘서 으쓱했다. 아무 준비 없이 왔다니 지베르니에 가면 모네 그림 속의 수련이 한창이니 가보라 하고 하이킹을 하고 싶으면 스위스 알프스에 다녀오라고 했다. 일요일이 프랑스 대선 결선투표 날이라 부활절 휴가를 아직 떠나지 않고 일요일 오후부터 모두 움직일 거라는 소중한 정보도 얻었다. 코로나로 최근 여행 소식들이 끊겨 있는 블로그들 대신 20년 차 파리지엥에게 필요한 소식들을 죄다 얻어 듣고 숙소에 도착했다.



숙소는 파리 사람들이 사는 동네 한가운데 있었다. 작은 가죽공방과 레스토랑 사이에 "Amilie"라는 작은 간판이 보였다. 앞으로 삼일 간 머물 곳이었다. 까만 긴 생머리를 가진 동양계 여성에게 체크인을 하고 달팽이관처럼 생긴 좁은 나무 계단을 두 층 올랐다. 사람 하나 서 있을 만큼의 공간을 중심으로 세 개의 문이 있었다. 이 중에 가장 왼쪽 문이 내가 머물 방이었다. 방 안에는 한 명 서 있을 크기의 샤워실과 화장실이 있었다. 창문을 가운데 두고 침대와 책상이 마주 보고 있었다. 옷장이 따로 없어 개방된 옷걸이에 걸도록 되어 있었다. 창문 밖으로는 일반 가정집의 창문과 마주했다. 가져온 옷을 모두 걸고 노트북에 전원을 꼽아 두었다. 카드 한 장, 핸드폰 하나 들고 동네를 천천히 걸었다. 날이 밝은데 좌판들을 정리하고 있어 저녁거리 구입을 서둘렀다. 크고 먹음직스러운 사과 두 알, 손바닥 만한 종이 그릇에 담긴 딸기, 줄기에 쪼르륵 달려있는 토마토를 담았다. 작은 유리병에 담긴 요플레 두 개와 바게트 빵, 물도 샀다. 시장 골목에 야외 테이블마다 사람들이 앉아 맥주를 마시거나 식사를 했다. 사람들 사이에 들어가 앉는 상상을 해보니 첫마디부터가 막혔다. 이번 여행에서 식당에서 밥을 먹는 게 제일 큰일이 될 것 같았다. 방으로 들어가며 에펠탑은 어딘지 물으니 조금 걸어 나가 위를 보라고 손가락으로 방향을 알려줬다. 호텔 문에서 오른쪽으로 스무 걸음 걷고 왼쪽으로 돌아 몇 걸음 걸어가 하늘을 보니 에펠탑 꼭대기 부분이 빼죽 보였다. 숙소를 찾아올 때 지도를 보지 않고 찾아올 수 있겠다.



가게 문들 다 닫는데도 해가 지지 않아 시계를 보니 이미 저녁 9시가 넘었다. 한국 시간으로 새벽 5시일 터였다. 스무 시간 이상 깨어 있다는 것을 깨닫자 얼굴 근육으로 피로가 몰려왔다. 달팽이 관으로 올라가 침대에 묻힐 것이다. 그리고 내 발로 나가고 싶어질 때까지 뒹굴거릴 것이다. 그게 이번 여행의 첫 번째 계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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