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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나무 Oct 22. 2023

아이들과 함께 간 지리산 종주

- 성삼재-노고단-연하천-뱀사골계곡 2박 3일

첫째 아이가 생기자 집에 티브이부터 없앴다. 6년 터울로 둘째가 생겼다. 남편이 퇴근해 둘째를 보는 시간에 첫째는 아빠의 핸드폰을 보기 시작했다. 아이는 아빠의 핸드폰으로 드래곤 플라이트라는 게임을 했다. 게임이 시작될 때 금빛 갑옷을 입고 말을 타고 있는 여자의 가슴이 도드라져 보였다. 둘째를 하루종일 따라다니다 저녁에 네 식구가 모이면 핸드폰 보고 있는 큰 아이를 따라다녔다. 한참 손가락으로 드래곤을 끌고 다니며 적들을 물리치고 있는 아들에게 이제 그만하라고 했다. 내 입장에서는 참을 만큼 참았다 한 말이었다. 온갖 장애물을 넘고 넘어 드디어 괴물과 마주해 팡팡팡 열심히 두드리며 다음 판으로 가느냐 마느냐를 결정할 결투 중이었던 아들은 그만하라는 내 말에 나를 노려봤다. 그러더니 핸드폰을 보며 “에이씨” 했다. 저 모습이 ‘욱’하다는 거구나. 그 순간 상담 때마다 듣던 선생님이 말이 이해되었다. 그리고 처음 보는 아들 모습에 앞으로 더 크게 반항할 모습이 그려져 걱정이 됐다. 


언젠가 새벽에 노고단에 올라 눈앞에 까지 내려와 빛나던 별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했지만 큰 아이가 “에이씨”했던 그 순간 나는 길을 잃었던 것 같다. 집에서 아이에게 좌절을 겪지 않아 밖에서 좌절하는 상황에 취약하다는 말이 그렇게 억울할 수 없었다. 둘째 어린이집을 등록하고 십 년 만에 무슨 일을 할까 한걸음 내딛으려는데 남편이 박사과정을 가겠다고 했다. 이제 내 차례인데. 남편도 몇 년을 망설이다 포기했던 건지 알기에 안된다는 말을 못 하겠었다. 나는 무슨 일을 할지도 막연한데 남편은 서류만 내면 되다고 했다. 육아 10년 끝이 사춘기 눈빛의 시작과 다시 시작하는 어린이집, 그리고 바쁜 남편에 박사과정 추가라니. 남편에겐 알았다고 했지만 내가 있는 자리가 싫증나 멀미가 났다.


열 살 아들과 네 살 딸을 데리고 지리산 종주를 하자는 내 말에 남편은 “네가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라고 까지 했다. 산이 얼마나 위험한지 몰라서 하는 말이라며 혀를 찼다. 작은 아이가 이제 막 10kg을 넘어가고 있었다. 지금 업고 가지 않으면 몇 년을 기다려야 할지 몰랐다. 둘째 아이가 혼자 걸어갈 때까지 기다린다 해도 첫째처럼 ‘에이씨’ 하며 안 간다고 하면 데려갈 방법이 없을 것이었다. 지금이었다, 마지막 기회였다. 둘째를 업고 갈 등산 캐리어를 샀다. 남편은 둘째를 업어야 하니 큰 아이와 내가 이틀간 종주에 필요한 음식, 옷, 간식과 물을 나눠 짊어졌다. 


이십 년 만에 지리산에 온 남편은 연신 길이 이렇게 좋아졌냐며 감탄했다. 성삼재에서 노고단까지 올라가는 길은 아스팔트 길이 곱게 깔려 있고 길 가에는 쉬어갈 의자와 평상이 힘들만하면 나타났다. 성삼재에 주차해 놓은 차를 산에서 내려가는 곳에 가져다주는 서비스도 생겼다. 전화로 예약할 수 있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하산지에 도착해 카카오택시를 불러 주차장까지 돌아오면 되었다. 남편의 옛날 등산 얘기를 들으며 걸었다. 산에서 만나는 어른들은 하나같이 아이들을 환대했다. 큰 아이는 이틀 내내 대단하다는 칭찬과 격려를 끊임없이 받으며 걸었다. 새벽에 연하천 대피소에서 작은 아이와 화장실에 다녀오는데 사진을 찍어주겠다며 핸드폰을 달라는 분도 있었다. 

 

그 속에서 나는 아이에게 좌절을 주지 않은 문제 있는 엄마가 아니라 어린아이들과 산에 온 대단한 엄마가 되어 있었다. 대피소에서 아침을 해 먹고 있는데 자그마한 체구의 중년여성 분이 마지막까지 아껴놓은 듯한 간식을 꺼내 둘째 아이 손에 쥐어주었다. 깡충깡충 뛰어다니는 둘째를 보며 등산객들은 얘가 어떻게 여기를 왔냐며 신기해했다. 지리산 산길을 걸으며 내 머릿속에서 시작된 사춘기 괴물과의 전투를 승리로 끝내고 돌아왔다. 게임에서처럼 빵빵한 가슴은 없지만 빛나는 등산 캐리어에 아이를 업은 여전사가 지리산 종주길에서 괴물을 물리치고 다음 레벨로 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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