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에게는 뭐가 보일까. 무엇이 기억으로 남을까. 아이와 함께 다녀보니 풍경이 중요한 거 같지 않다. 풍경에 감동받지도 않아 보였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를 생각해 봐도 담임 선생님 따라갔던 등산이 그리 재밌지 않았다. 산에서 먹은 콜라와 초코파이가 기억에 남아있다. 맛있었다. 높은 산에 올라서 본 어느 산을 신기했지만 감동까진 아니었다. 다녀왔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초등학생인 아이를 데리고 산을 다녀보니 시야가 터지는 곳까지 짜증 내며 갔다. 처음 데려갔던 땅이 젖어있었다. 흙길이 질어지면 그만큼의 짜증을 더해 냈다. 왜 아이를 데려왔을까 후회됐다. 억새밭이 나오고 시야가 탁 트였다. 얼마나 높은 곳에 올라왔는지 알게 되자 아이의 짜증이 환희로 바뀌는 것을 봤다. 정상석에서 사진을 찍고 나자 이걸 누구에게 자랑할까에 골몰했다. 하산 길 내내 이 소식을 알려야 할 곳들을 꼽았다. 짜증 한번 없이 경쾌하게 내려갔다. 내려와서는 당근으로 걸었던 고기 사주고 칭찬을 듬뿍 했다. 아들에게 이렇게 산에 다니는 친구들이 몇이나 있겠냐고 했는데 그건 정말일 터였다.
갑작스러운 설악산행은 "엄마는 저녁 시간과 주말에 화가 많이 나 보이는데 왜 그런 것 같냐"는 아들의 질문이 시작이었다. 나도 반복되는 패턴에 지쳐가며 원인이 뭘까 생각하던 터라 대화가 됐다. 둘째가 어린이집에 가고 삼 년 만에 자유시간이 생겼다. 자유에도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는데 잘 몰랐다. 아이들이 돌아올 시간이 되면 저녁준비에 바쁜 게 아니라 저녁준비도 안 해놓고 뭐 하며 하루를 보냈는지 따지느라 바빴다. 어린이집에서 돌아온 둘째 아이가 이것저것 요청하기 시작하면 저녁준비를 하기 위해 둘째를 식탁에 앉혀놓고 영상을 보여주었다. 밥만 안칠 때까지, 반찬 꺼낼 때까지, 생선만 에어 프라이기에 넣을 때까지 영상을 틀어주다 보면 큰 아이가 방에서 "왜 쟤는 보고 나는 안 보냐며!" 의자를 박차고 나오는 소리가 났다. 저녁마다 내가 화가 나 있는 이유였다. 아빠와 스타크래프트 게임을 하고 싶어 하는 아들에게 주말은 해도 된다고 허락했다. 집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는 이제 주말을 컴퓨터 앞에서 보내기 시작했다. 정말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아이 뒷모습을 그대로 두어도 되는지 보면 걱정되었다. 주말에 짜증을 내고 있는 이유였다. 아들과 한 주는 게임을 충분히 하고, 한 주는 엄마와 산에 가든 박물관이든 밖에 다녀오자고 했다. 아이는 엄마와 여행을 가면 한 곳에 머물지 않고 계속 이동해서 힘들었다며 엄마랑 어디 가는 게 힘들다고 했다. 여름방학에 남편이 휴가를 못 내서 아이들만 데리고 서해안 일주를 했었다. 그때인지 서로의 기억을 더듬었다. 약속과 다짐 끝에 설악산에 가기로 정해졌다. "무슨 초보가 맨날 1000m가 넘는 산만 가!"냐는 핀장을 받은 끝에 "아, 정말 가기 싫은데"라는 대답이 "알겠어."로 바뀌었다. 이토록 어렵게 날짜를 잡았는데 그날 강수 확률이 60%였다. 조용히 토요일에 못 오르면 일요일에 오를 걸 염두에 두고 출발준비를 했다. 플랜 B에 대비해 숙소에 종일 머물 경우 볼 노트북과 아이패드를 챙겼다.
설악산에 간다는 말에 남편은 걱정하며 짧게 다녀올 수 있는 마니산을 권했다. 날씨를 확인하니 마니산 쪽엔 비소식이 없었다. 갈등이 됐다. 그런데 내 키를 이제 막 넘어서고 있는 열두 살 아들과 함께 설악산을 다녀오고 싶었다. 날씨는 변하는 경우도 많으니 일단 주말에 게임하는 생활이 더 단단히 굳기 전에 균열도 낼 겸 해서 말이다. 산에 다녀온 경험이 쌓이면서 스타일이 생기니 코스 고르기가 쉬워졌다. 초기에 갔던 소백산은 가장 쉬운 산, 쉬운 길을 선택해 올라갔었다. 소백산 정상에는 숨을 꼴딱이며 올라야 하는 암벽길 대신 탁 트인 풍경을 보고 걸을 수 있는 데크길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 멋진 길을 다녀와서 아이는 소백산이 지루했다고 했다. 그래서 다음에 간 치악산은 가장 빠르게 올라갈 수 있는 가파른 코스를 택해 갔는데 힘들게 다녀와서도 이게 우리 스타일이라고 했다. 설악산 정상까지 가장 빨리 다녀올 수 있는 건 오색 코스였다. 어느 블로그에서는 98%가 오르막길인 곳이라고 쓰여있었다. 날씨에 맞춰 우비를 챙기고 아빠와 발크기가 같아진 아이에게 아빠 등산화를 신겼다.
오색 코스 바로 앞 숙소가 만실이었다. 차로 20분 거리에 숙소를 정했다. 토요일에 일어나 창밖을 보니 설악산이 보이지 않는다. 어제 분명히 있었는데 안개에 싸여 흔적도 없다. 아이와 하루 더 묵으며 내일 올라가자며 플랜 B를 가동했다. 대신 집에서의 주말처럼 게임을 허용했다. 숙소에서 종일 뒹굴대며 나는 유튜브를 보고, 아이는 게임을 하고 있자니 뭐 하고 있나 싶었다. 그러다 "이게 바로 산에 가는 과정이지" 하고 정신을 차렸다. 내가 원하는 걸 하려면 상대 원하는 것도 들어줘야 하는 거니까. "내가 왜 아이에게 게임을 하게 했을까" 하고 긴 과정을 뒤적거려 본들 그때그때 최선을 다한 결과의 오늘일 터였다. 뒹굴거리며 쌓이는 에너지를 지금 여기의 최선을 찾는데 쓰기로 했다. 다행히 다음날 강수확률은 20-30%였다. 숙소를 하루 더 연장하려 했더니 숙박비가 어제의 세 배였다. 엄마는 자꾸 이동해 같이하는 여행이 힘들다는 얘기를 들어 쉽게 움직일 수가 없다. 아이에게 상황을 얘기하니 그래도 짐 싸서 움직이기 싫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숙박비를 결재하고 났더니 청구서 날아올 날은 멀었고 안 움직여도 되니 나도 편하고 좋았다.
지리산을 열 번, 설악산을 두 번 다녀왔다는 남편은 아이들과 지리산에 가자는 나에게 "죽으려고 환장을 했구나"라고 했었다. 둘째를 업고 갈 등산 캐리어를 준비해 한 명은 매고, 한 명은 걸려 노고단을 올라가며 남편은 "길이 많이 좋아졌네" 라며 감탄했다. 남편의 걱정은 20년, 30년 전에 경험을 기준으로 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걱정했던 설악산을 오르며 보니 계속되는 오르막길 한 켠으로 쉼터가 잘 정비되어 있었다. 예전에 없던 것이겠지 싶어 남편에게 사진을 찍어 보내주었다. 단풍을 기대했건만 이제 단풍은 이제 물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진짜 진짜 멋있다는 설악의 단풍을 보는 것은 다음을 기약해 본다. 오늘은 설악산과 첫 만남으로 충분했다. 산에 오르며 내내 툴툴거리는 아이는 어느새 커버리고 없다. 나만큼 커버린 아이는 나보다 조금씩 앞서가면서 간간히 나에게 "엄마, 쉬어갈까?"하고 물어왔다. 아이는 금세 적응해 자기 리듬으로 걷기 시작했고 나는 한 시간이 지나서야 몸이 풀렸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이와 산행하며 이야기 나누는 맛을 좋아했는데 그러려면 완만한 산을 택해야 한다는 것도 이번에 알았다. OK쉼터를 지나자 내리막이 처음으로 나왔다가 다시 오르막길이었다. 초반에 산을 함께 올랐던 어머니 한 분이 도로 내려오신다. "왜 벌써 내려오시냐" 물었더니 날이 너무 안 좋아 내려간다고 했다. 아이 데리고 얼른 내려가라며 다음에 또 오면 된다고 했다. "지금 내려가긴 너무 아까운데" 아들은 한번 올라오기도 어렵지, 시작하면 중간에 내려가자는 법은 없다. 대청봉까지 1.3km를 남겨놓은 쉼터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니 심상치가 않다. 우비가 홀딱 젖어있다. 내려오는 사람들 뒤로 안개 때문에 길이 보이지 않았다. 날씨를 확인하니 어느새 강수확률이 60%로 바뀌어 있다. 내려가는 수밖에 없다. 아이와 함께 우비 하나씩 입고 하산했다. 정상 맛을 봐야 다음 산행을 기약할 수 있는데 싶어 아쉬웠지만 당장은 빗길에 내려가는 게 큰일이었다. 가파른 길들을 올라왔던 터였다. 내리막길에 엉덩방아를 찧는 사람들을 셋을 봤다. 발가락마다 어찌나 힘을 주며 내디뎠는지 허벅지가 얼얼하다. 아이는 비오니 너무 짜증 난다고 하며 내려갔다. 정상 찍고 내려오는 하산길은 우다다다 거리며 예전 등산 때 있던 에피소드들 나누며 순식간에 뛰어내려오는 길인데 짜증 내며 내려오게 되다니 아쉬웠다. 다행히 한 번도 넘어지지 않고 출발했던 입구까지 도착했다. 잠바까지 3겹이었는데 우비까지 입으니 너무 더웠다고 했다. 그럴 땐 옷을 하나 벗고 내려오는 방법도 있다고 알려줬다. 옷을 갈아입고 씻고 출발하고 싶은데 아이가 바로 올라가고 싶다고 했다. 올라오는 길 운전은 산행보다 힘들었다,. 다리는 후덜 거리고 피곤해서 휴게소마다 들러 커피를 충전하고 간식을 우물거리며 왔다.
여기까지, 대청봉 가다 만 이야기이다. 그동안 산행은 힘들었지만 정상에 가보니 너무 좋았다의 연속이었다. 계속 오르막이라 힘들었는데 비 와서 우비 입고 내리막은 더 짜증 났다는 기억은 어떻게 변해갈까. 그걸 확인하려면 다음 산행을 해보는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