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과시간제한이 있는 산에 가는 방법
마스크 써야 하는지도 모르던 코로나 초기였다. 상황은 매일 심각해갔다. 자주 오가던 이웃집과 왕래도 조심스러워졌다. 어린이집에는 가정보육 권고지침이 왔다. 이제부터 긴급보육으로 운영된다고 했다. 만나는 사람도 없고 아이들은 마스끄 끼로 생활했다. 직장에 다녀온 남편도 집에 오자마자 씻고 아이들을 만났다. 어린이집에 나오는 아이들이 매일 줄었다. 데리러 가보면 둘째가 혼자 기다리고 있었다. 큰 아이가 다니던 대안초등학교도 우왕좌왕했다. 처음 겪는 일에 작은 학교의 장점이 발휘하지 못했다. 일반학교가 문을 닫자 같이 문을 닫기로 결정했다. 아이 둘 과 집에 있게 되었다. 일상이 멈췄다. 나날이 잠을 못 잤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제주에 갔다. 관광객이 없는 제주는 어디든 텅 비어있었다. 현관문을 나서면서부터 만지지 말아야 할 것 가지 말아야 할 곳에 민감해 있다가 마당이 있는 집에 살게 되니 숨통이 틔였다. 출입구가 집 뒤로 나 있어 외부인과 부딪힐 일이 없었다. 작은 마당에서 노는 아이들은 한눈에 보였다. 4살 딸과 10살 아들은 마당에서 그네를 탔고 햇볕을 아래서 시간을 보냈다. 며칠 먹을 장을 봐왔다. 매 끼를 만들어 먹었는데 공항 식당에서 먹었던 비빔밥을 떠올리며 만들기도 했지만 대체로 간단히 차려 먹었다. 계란을 삶거나 샐러드를 만들었다. 새우를 구워 먹기도 했다. 근처에 금능 바다까지 걸어갔다 오면 해가 어둑어둑 졌다. 매일 밤 마당엔 별이 뜨고 달이 떴다. 저녁 8시가 되면 주변 모든 가게가 문을 닫았다. 늦게 퇴근해 오는 남편이 없으니 아이들은 안 자겠다고 핑계 댈 것이 없었다. 할 일 없는 제주의 까만 밤이 오면 아들이 일찍 잠들었다. 해야 할 것도 미래를 준비할 것도 없는 곳에서 나에게도 밤잠이 다시 찾아왔다. 점 점 얇아져 찢어질 듯했던 세상과 나 사이의 경계막이 다시 단단해져 갔다.
아이 셋을 데리고 이웃도 제주로 왔다. 집에만 있다가 제주에 차를 가지고 온 이웃 덕에 새별 오름을 가봤다. 새별오름은 대접을 엎어 놓은 듯한 모양이었다. 주차장에서 보니 왼쪽 등으로 올라 오른 등으로 내려오는 사람들이 작게 보였다. 아이들은 서로 뛰어올랐다. 이웃이 머무는 동안 새별 오름을 자주 갔다. 숙소에 있는 그림책에서 한라산을 제주 오름들의 어머니라고 했다. 한라산이 궁금해졌다. 남편이 오다고 해서 한라산 근처에 절물 휴양림을 예약했다. 주말인데도 자리가 있었다. 휴양림에서 하룻밤을 자고 아침 일찍 네 식구가 한라산 성판악에 갔다. 성판악 주차장은 이미 만차여서 갓길에 주차된 차들의 꼬리를 물고 주차를 했다. 매점이 있어 김밥과 초콜릿, 물을 샀다. 성판악 등산엔 시작길엔 야자매트 길가 깔려있었다. 어린아이와 오르기 만만한 길이었다. 바닥의 검은 현무암과 주변에 핀 낯선 꽃, 낯 선 나무들은 육지에서 산에 다닐 때 못 보던 것이었다. 얼마쯤 가니 사람들이 멈춰 서있다. 숲 속 안쪽을 바라보고 있어 시선을 쫓아가니 사슴 무리가 풀을 뜯고 있었다. 뿌연 안갯속에서 풀을 뜯고 있는 사슴은 연갈색이 도는 잿빛 털을 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색이었다. 이 세상이 아닌 천상에 사는 사슴처럼 보였다. 아이들도 사슴이 풀 뜯는 모습을 넋을 놓고 봤다. 시간을 보니 이런 식으로 가다 다 갈 수 있을까 싶어서 큰 아이와 나는 앞서가기로 했다. 아빠와 둘째는 뒤에서 천천히 올라오기로 하고 헤어져갔다. 큰 아이와 속밭 대피소까지 가서 쉬었다. 대피소 유리창이 흔들렸다. 헬리콥터 소리가 들리더니 대피소 창 밖의 모든 나무 가지와 잎들이 정신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공사 짐을 실은 헬리콥터가 가까이 오고 있었다. 헬기는 착륙하지는 않고 공사장 근처에 보따리만 내려놓고 갔다. 옆에 화장실 수리 자재인 듯했다. 헬리콥터 소리가 멀어지자 흔들리던 나무들도 멈췄다. 우리도 다시 출발했다. 완만했던 길은 사라오름 근처를 지나자 오르막으로 바뀌었다. 뒤에 오던 청년 둘이 앞서가며 진달래 대피소까지 1시 안에 도착해야 정상까지 갈 수 있다고 했다. 등산앱을 보니 대피소까지는 남은 거리는 1.5km가 남았다. 오르막길이라 예상 시간은 한 시간 반이 걸린다고 했다. 시계를 보니 열두 시가 조금 못 되었다. 시간이 빠듯했다. 우리를 앞서간 청년들은 뛰기 시작했고 우리도 뒤따라 뛰었다. 계속 가파른 오르막이 이어져 계속 뛰어갈 수가 없었다. 숨을 헉헉대며 계단에 앉아 쉬고 있는데 하산하는 등산객이 다음에 또 오면 되지 얘를 이렇게 뛰게 하냐고 했다. 돌아보니 아이 성격 상 기어이 해내려 하고 있는 게 보인다. 빨리 올라갈 생각 하다 하다 멈췄다. 아이와 나를 쥐어짜며 가지 말고 다음을 기약하자고 했다. 아쉬워하며 내려와 속밭 대피소에 있는 남편과 딸을 만나 내려왔다.
일반학교 휴교 연장이 발표되었다. 휴교를 더 할지, 등교를 재개할지 선택할 수 있는 큰 아이가 다니던 대안학교가 휴교연장을 선택했다. 우리도 제주에 더 있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주말에 한라산을 한번 더 다녀오기로 했다. 남편이 딸을 봐주고 아들과 둘이서만 다시 가기로 했다. 이번엔 일찍 서둘렀다. 얼마나 서둘렀는지 아침 식사를 했는데도 일곱 시 반 전이었다. 이 시간에는 성판악의 주차장도 자리가 많았다. 이른 아침, 해발 750m에 있는 성판악 주차장엔 새벽바람이 씽씽 불어댔다. 예상치 못한 날씨였다. 아들과 한라산 초입에 들어섰다. 완만하고 편한 길인데도 아이가 몇 걸음 가더니 멈춰 섰다.
“엄마 나 추워. 더 못 가겠어”
경량패딩에 목도리까지 칭칭 감았건만 아들은 씽씽부는 바람기세에 더 갈 엄두를 못 냈다. 초입만 통과해서 숲으로 더 들어가면 바람이 잦아들 것 같은데 아이를 설득해 밀고 갈 수 없었다. 한라산의 아침 바람은 내가 느끼기에도 거셌다. 이렇게 한라산에 오를 기회를 날린 게 애석했지만 달리 도리가 없었다.
“그래, 돌아가자”
코로나는 날로 더해갔다. 오랜만에 안부를 물어오는 통화에 제주에 있다고 하면 잘 갔다고들 했다. 거기 더 있으라고, 이젠 어딘가를 오가는 것이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었다. 한 주 더 제주에 있기로 했다. 집에선 아이들과 집안일로 늘 바빴는데 여행지에선 할 일이 없었다. 밥하고 아이 돌보는 일상은 똑같았지만 안 하고 있는 일, 밀린 일, 이때 하면 좋은 일들이 사라지니 여유가 생겼다. 아이들과 하루 세끼 해 먹으면 오늘 할 일 끝이었다. 숙박비가 덜 드는 민박집으로 옮겼다. 주인집과 마당을 두고 지냈다. 마당에 오리가 다니고, 기니피그 집이 있고, 신발장을 집 삼아 새끼 낳은 고양이가 있는 곳이었다. 작은 아이가 눈만 뜨면 마당에 나갔다. 공용부엌에 새끼 고양이가 태어난 상자도 가보고 기니피그 먹이도 줬다. 제주에 와서부터 잠을 잘 잔 덕에 나는 건강이 회복했다. 에너지가 고이니 쓰던 원고를 다시 볼 수 있었다. 마당엔 건너편 바다로, 귤밭으로 주인집 부부가 오갔고 코로나로 학교에 못 가고 있는 주인집 초등학생 남매도 자주 나왔다. 아들은 나이가 같은 주인집 아들과 주변 나무를 주워다 집을 지으며 시간을 보냈다. 둘째는 동물들을 내내 밖에 있다가 가끔씩 방에 들어왔다. 이웃과 함께 아이를 보게 되니 일상에서 깨졌다고 느꼈던 게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코로나로 아이들을 함께 보던 관계들이 모두 단절되었다. 그리고 그 일상은 언제 회복될지 요원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간 다는 것은 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뜻했다. 뭔지 모르고 힘들기만 하다가 뭐가 문제였는지 알게 되니 해결책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단은 제주에 시간 동안 원고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라산에 한번 더 도전하기로 했다. 아마도 이번이 마지막 도전이 될 터였다.
아이와 출발할 수 있는 너무 이르지도 늦지도 않은 시간을 가늠해야 했다. 진달래 대피소를 1시에 통과할 수 있는 가장 늦은 출발시간을 계산했다. 산까지 가는 길도 차에서 자면서 가지 않게 하고 중간에 김밥을 사러 내리고, 편의점에 들르게 해서 깨어서 가게 했다. 그렇게 가니 주차장은 이미 만차였다. 갓길에 차를 세우고 성판악 입구 매점에 들러 따뜻한 어묵을 함께 사 먹었다. 뜨거운 국물로 출발 전까지 아이 컨디션을 올리려 했다. 아이가 이제 오르자고 했다. 천천히 등산을 시작했다. 첫 산행에서 사슴을 만났던 길을 지났다. 속밭 대피소에 들려 물 한잔 마시며 쉬어갔다. 사라오름도 들렸다. 등산로 왼편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한라산에 있는 386개의 오름 중에 가장 높다는 사라오름에 갈 수 있었다. 갑자기 호수가 나타났다. 해발 1324m에 호수가 있었다. 물이 맑아 바닥이 비쳤다. 새벽마다 사슴들이 모여드는 목을 축이고 있는 모습이 그려졌다. 한라산에 사는 동물들의 약속장소일듯했다. 사라오름에서 올려다보니 한라산 정상이 보였다. 진달래 능선에 도착했다. 11시 47분이었다. 12시 반까지 점심 먹고 쉬었다 오르기로 했다. 대피소 안팎에서 사람들은 서로 멀리 떨어져 점심을 먹었다. 대피소 안에서 식사 마치고 산책하며 백록담까지 올라가는 길을 찾아놨다. 백록담으로 향하는 길에 직원이 서 있었다. 통제시간이 다 되었다는 안내방송이 나오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진달래 대피소까지 3시간이 넘게 걸려 도착했는데 여기서부터는 두 시간 더 가면 정상이었다. 대피소 이후에도 정상까지 오르락내리락 없이 완만한 길이 이어졌다. 한라산 전체 등산로가 대부분 그랬다. 어느 순간 풍경을 가리던 나무들이 사라지고 한라산 정상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뒤따라오는 아들을 돌아보니 아들 뒤로 제주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제주도의 이쪽 끝과 저쪽 끝이 한눈에 들어왔다. 제주도는 이렇게 생겼구나. 고도가 높아지니 간식으로 가져온 양파링 봉지가 빵빵하게 부풀었다. 아들이 눌러보며 웃는다. 해발 1950m 정상에 도착했다. 백록담은 말라 물이 없었다. ‘한라산 백록담 1950’이라고 쓰여 있는 고목에서 사진을 찍었다. ‘한라산 천연보호구역’이라 쓰여 있는 화강암 정상석에서도 기념사진을 찍었다. 백록담의 하산 제한시간은 2시였다.
걸릴 것 하나 없는 내리막을 뛰어 내려왔다. 집으로 돌아오니 저녁 6시 반이 넘어 있었다. 남편에게 보여주는 사진 속에 아들은 머릿속까지 땀에 푹 젖은 채 눈빛을 반짝거리고 있었다. 아빠도 끝까지 못 가본 산을 정상까지 다녀왔다며 남편은 아들을 기특해했다. 세 번 도전만에 열 시간이 다 되는 산행을 해내다니 나도 아들이 대견했다. 산이 아무리 완만했다 해도 열 시간이 걸리는 산행이었다. 제주도를 떠나는 날, 아침에 한라산에 눈이 왔다는 뉴스가 나왔다. 4월의 한라산이 하얕게 덮여있었다. 공항에 렌터카를 돌려주기 전에 차로 갈 수 있는 한라산 중턱에 갔다. 한라산의 눈을 밟고 만지며 아이들과 싣컫 놀았다. 힘든 시기에 우리를 품어준 한라산에 다시 한번 힘껏 안기고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