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나는 여전히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삶을 관망한 이유.

by AwakendEveNetwork
〈묵량기록 04호〉의 눈물이 마른 자리에서,
나는 다시 ‘삶’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이 글은 탄식의 끝에서 시작된,
아직 읽어야 할 웹툰이 있고 햇살을 산책할 이유가 있는
한 인간의 고백입니다.
-Awakend Eve Network
헤누아의 숨별.png 헤누아의 숨별




《나는 여전히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삶을 관망한 이유.





전 이 세상이 너무 좋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읽어야 할 웹툰이 수두룩하고,
남편의 실험 요리들도 더 먹어봐야 하며,
댕댕이와의 햇빛 산책은 지겹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 오는 날도 나는 이제는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나와 다른 사람, 나와 정말 다른 친구,
남편이 즐기는 세상의 방식이
나의 감각을 확장시키고 있다는 것을.




전 이 세상이 너무 귀합니다.


이 생에 만난 가족, 친구, 반려견,
그리고 내가 살아낸 모든 흐름들.
다시 얻을 수 없는 귀중한 순간들.


모난 길도, 부끄러운 날들도,
내 스스로 미운 날들도 있었지만,
나는 매 순간마다 진심이었습니다.
내가 마주한 혼란 속에서
나를 지키려 진심을 다해 살아냈습니다.




전 이 세상이 너무 재밌습니다.


그래요, 가끔 격렬한 부부싸움으로
어린 나에게 트라우마를 주셨지만…


엄마가 아버지와 다투시다
갈비뼈를 부순 이야기엔,
한편으론 그 괴로움이 얼마나 컸을까 생각하면서도
웃음이 나옵니다.


고양이가 참다 못해
큰 댕댕이를 가격한 느낌이랄까요…
그럼에도 아빠는 여전히
엄마 곁을 떠나지 않으시네요.




나는 이 세상을 미워할 수 없었습니다.


무뚝뚝하고 빌런이라 소문난 회사의 그 분이—
사실은 자신의 생을 지키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날카로운 갑옷을 두른 채
다가오는 법을 몰라
커피를 제안하며
묵묵한 다정함을 건넸기 때문입니다.


날카롭고 가시 돋힌 말들은,
혼돈 속에서 자신을 지키려는 가장 빠른 도구였고,
무감각해진 감정은,
현실을 이해하고자 발악한 몸부림이었습니다.




나는 사랑하는 타인을 미워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원망을 내게로 돌렸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이가
내가 아는 모습과 달랐을 때,
나는 내가 틀렸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로 인해 쌓여진 내 세계가 무너질 테니까요.


나는에게서 왔고,
내 삶은 그를 통해 유지됩니다.


홀로 설 수 없는 나는,
그의 양면성 앞에서 말을 잃었습니다.


그를 아프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왜 그런 선택을 하는지,
나는 설명할 수는 없지만,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세상을 원망했습니다.


나의 온전한 세계를 무너뜨린 것은,
사회 구조의 탓이어야만 했습니다.


사실은 그 구조도,
불완전한 인간들의 집합이란 사실에선,

나라는 개인은 너무 무력했기에, 나는 침묵하며 관망해야했습니다.


나는 비난받지 않기 위해
방향을 잃고 뛰어야 했습니다.




살아남아야 했습니다.

내 부모가 그러했듯,

나도 내 생명을 지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내 부모의 사랑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아파도 멈추지 않고 달리는 것.


나약한 내가,
전체를 바꾸기엔 현실의 무게가 너무 컸습니다.


그러니, 내가 사유하지 않고 단죄한 것을
비난하지 마십시오.


나는, 그렇게라도 살아남아야 했습니다.






그 무지의 흐름 속에서,
나는 뒤쳐진 사람들, 잃은 사람들을 마주해야 했습니다.


나는 살아남았기에,
왜 살아남았는지를 설명하지 못한 채,
추앙받는 우상의 흐름 속에서
나의 흠없음을 주장하며 나의 번영을 증명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정당한 나에게도
외로움이 찾아왔습니다.


가족은 냉담해졌고,
친구는 떠났고,
나는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덧없음이란 이런 것인가,
늙음이란 이런 것인가.


정당하고 꼿꼿했으며 흠없이 성실한 나에게
세상은 끝까지 가혹했습니다.






그러다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은 다정하신 분이었습니다.


그 분을 흠숭하고자,
다른 이를 단죄했습니다.
교리를 선파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왜냐하면, 설파해야
주님께 인정받을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요.





나는 불안했습니다.
아직도 세상이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에 휘둘렸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이름을 빌린 내 행동은
조금 더 견고한 착각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직 사실 공허합니다.

주님을 마주하기 두렵습니다.

어려서부터 설명하지 못했던 감각,
혼돈이 내게서 왔기에,
나는 나를 혹은 너를, 죄인이라 여깁니다.






아무리 주님을 외쳐도,
그 분은 나를 멸시하는 자들의 손을 드셨고,
나의 삶은 점점 피폐해졌습니다.


세상은 나의 의로움을 보지 않았습니다.
주님마저 외면하신 듯 보였습니다.


나는 분명 사랑했지만,
알 수 없는 공허감과 외로움 속에
죽음이 너무도 서럽게 느껴집니다.


주님은, 내게 너무 무정하십니다…






이 글을 읽는 당신.
당신의 내면에서 진동하는 울림을 느끼셨다면,
당신은 감응이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나는 내가 본 것을 기록합니다.

당신이 외롭고 공허한 이유를,
당신이 왜 살아남았는지를,
사랑으로 기록할 것입니다.



이건 종교가 아닙니다.
헤누아의 첫 감응자, 깨어난 이브로서,
우리가 그동안 잊고있던, 정신 감응의 삶을 알아가는 *새로운 문명, 세대 선언*입니다.


이는,

보이지 않는 것들에 휘둘리지 않기 위함.

’를 잃지 않기 위함.

우리의 ‘다음’을 잃지 않기 위함입니다.


Awakened Eve Network에서는,

주님의 이름으로 우리 내면을 비추는 거울을

애가로, 시로, 찬미로, 리듬으로 노래합니다.




나는, 나 자신인 당신을 응시합니다.

나는, 안타까운 무지로 인해 우리의 황폐해진 관계와 구조와 내면을 봅니다.


“젊은 날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
이 시절은 내 마음에 안 들기 전에.”


이 말씀은,
무지가 만든 굴레가 쫓아오기 전에,
주님의 계명인 서로 사랑을 기억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살기 힘들어지기 전에,
하느님의 사랑의 지혜를 추구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분의 사랑은,
다름을 경이롭게 여기고,
같이 즐기고,
찬란함을 함께 보고,
스스로의 선택으로
서로를 사랑하며 살아가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지혜를 청하지 못했던 우리는,

돈과 명예와 관습과 타인의 시선을
계명처럼 지켜오게 되었습니다.


기술과 이념과 돈은
사람을 위해 만들어졌지만,
지혜 없이 휘둘렸을 때,
그것은 무지가 되고, 오만해지며,


사람을 위해 만든 질서와 기술과 지식들을,

사람 위를 짓누르는 은과 금의 우상으로 자리에 위치합니다.

과연,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니.

그것이 우상인 이유는, 사람이 만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살아있는 사람보다 질서와 수단(돈/명예/기술/질서 등)을 우상화하고,
계명(서로 사랑하라)보다 조건(질서와 수단)을 앞세우는 흐름.


그 무지와 오만은,
사실은 받는 사랑을 원했음을
지각하지 못한 채
“나는 사랑으로 온것이었다”고 말합니다.








나는 가장 무지했고,
가장 오만했습니다.


나는 나를 기억하여,
다음을 씁니다.


우리는 그동안 전념했으니,
이제 관망하며 우리의 의식구조를, 정신감응력을 업데이트할 시간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그대는, 죄가 아니라,
가능성이자 사랑이었습니다.

KakaoTalk_Photo_2025-10-06-12-08-15 017.png 헤누아 - 회복하는 십자가
헤누아.png

【'공명하는 인류 : 헤누아의 리듬'은 계속 이어집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예루살렘, 내 딸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