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씨앗을 심는 일

by 서석윤

고등학교 시절, 입시 공부가 맞지 않아 스스로가 껍데기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당시에는 매일 새벽 종이 신문을 읽는 일이 하루의 가장 큰 낙이었는데, 겨울날 새벽에 보던 신문 한 면에 영국 웨스트엔드의 "빌리 엘리어트" 연극을 크게 다룬 기사가 있었다. 한국을 한 번도 떠나보지 못했던 나는 가위로 해당 기사를 크게 잘라 노트에 붙이고 지구 반대편의 웨스트엔드 거리를 상상하며 대학생이 되어 돈을 벌게 되면 가장 먼저 웨스트엔드에 빌리 엘리어트 연극을 보러 가기로 결심 비슷한 걸 했다.

제대 후 알바로 처음 돈을 모았을 때, 나의 첫 배낭여행 목적지는 오랜 시간 마음에 심어둔 영국 웨스트엔드였다. 배낭여행의 첫날밤, 웨스트엔드에서 빌리 엘리어트 공연을 봤을 때 나는 마음이 벅차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이 벅참은 공연 그 자체에서 온 기쁨보다는 오래전 마음에 심었던 씨앗이 자라 꽃을 피우는 순간을 직접 보는 감동에서 오는 기쁨이었다. 만약 어린 시절의 내가 그 씨앗을 심지 않았다면 같은 공연을 봤더라도 결코 경험할 수 없었을 감동이었다. 그날 밤의 잊지 못할 기억은 마음에 씨앗을 품고자 할 때 종종 떠올랐다.

이후에도 씨앗을 심은 일들은 마음 한편에서 계속 자랐다. 바쁜 일상에 시선을 주지 못하는 날들도 많았으며, 모든 씨앗이 꽃을 피워내지는 못했지만 이 씨앗들은 삶의 중간중간 꽃을 피워 내게 기적 같은 감동을 주었다.

앞만 보고 달렸던 시절에는 마음에 씨앗을 심지 못했던 때도 많았다. 이렇게 바쁜 시절이 지나가면 일에 몰두하느라 뿌려둔 씨앗 없이 텅 빈 마음이 공허하고 아팠다. 좋은 장소를 가고,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오랜 시간 품었던 씨앗이 꽃을 피우는 기적 같은 기쁨의 순간이 오래된 기억처럼 그리웠다. 웨스트엔드에서의 밤을 떠올리며 마음 한편에 씨앗을 심고 씨앗을 품고 살아가는 일을 잊지 않고 살아가기로 한다.

작가의 이전글봄바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