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문구를 사는 일

by 이단아

‘덕후’, 어떤 분야를 좋아하고 많이 알고 열정적으로 몰입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그리고 나는 “무슨 덕후야”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을 부러워만 하는 덕후 덕후(?)다. 어떤 분야에도 깊이 몰두하고 빠져서 돈과 시간을 아낌없이 할애하는, 그렇게 사랑하는 마음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마법으로 이어지는, 무엇! 하면 누구!가 되는 일. 덕후라는 건 그렇게나 멋진 것인데 말이다.


이 덕후 기질을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가지 속에서 발휘하는 사람들도 있는 이 세상에 어느 것 하나도 가지지 못했다는 사실이 언제나 비통했다. 그래도 포기는 이르다 싶어 내 소비 내역을 뒤졌다. 어릴 적 기억도 뒤졌다. 나는 대체로 무엇에 돈을 쓰나? 어떤 순간에 행복한가? 그 질문에 부합한 딱 하나가 있었다. 책과 문구를 사는 일다.


어릴 적 우리 집은 가난했다. 대구에서 상경한 부모님과 나, 동생 네 식구는 서울 삼선교의 낡은 단칸방에 살았다. 외식이라고 해봐야 동대문 야채 곱창집에서 부모님은 곱창 2인분, 동생과 나는 2천원짜리 짜장면을 먹는 게 전부였다. 외식이 끝나면 다음 코스는 무조건 중고책이었다. 아빠는 낡은 책들을 한참 고르고 골라 노끈에 묶어 집으로 가져왔다. 가끔은 동화책이나 만화책, 골동품에 가까운 장난감도 샀다. 그게 그때의 우리 놀이였다.


아빠의 노력 덕에 집은 점점 방 두 칸으로, 아파트로 바뀌었다. 외식 메뉴는 돼지갈비로 바뀌었고, 동대문 중고책은 광화문 교보문고의 새 책으로 변했다. 주말에 아빠를 따라 교보문고에 가면 기본 세 시간이었다. 각자 흩어져 책을 고르다가 약속한 코너에서 만나는 방식이었는데, 나는 절반의 시간을 책에 쓰고 나머지 절반은 핫트랙스에서 보냈다. 다이어리, 펜, 귀여운 캐릭터가 그려진 노트. 새로운 이야기, 새로운 노트와 펜, 그것들은 작심삼일이 일상인 나에게 에너지 부스터였다. 이 책이 끝나고 나면, 이 노트를 쓰기 시작하면 어떤 기분일지 상상할 때 그렇게 기분이 좋아질 수가 없었다.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된 뒤, 아빠가 처음 서울에 올라왔을 때 가진 돈이 딱 이백만원이었다는 걸 알았다. 점심 먹을 돈이 없어 붕어빵으로 끼니를 때운 적도 있다고 했다. 그 돈을 아끼고 모아 외식을 하고 책을 샀던 거다. 어쩌면 아빠는 책을 통해 가족을 건사할 멘탈을 다스리고, 불안을 잠재우고, 미래를 꿨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그 즈음의 아빠 나이가 됐다. 나 역시 일이 맘처럼 되지 않을 때, 나도 모르게 책부터 덥석 산다. 스트레스가 쌓이면 근처에 이쁜 문구점이 없는지 찾아본다. 머리가 시끄러워지는 날에는 조용히 앉아 종이와 펜을 들어 본다. ‘책 덕후’가 될 만큼 많이 읽지 않아도, ‘문구 덕후’가 될 만큼 다꾸를 섭렵하지 못해도 괜찮다. 이 두가지가 나를 다시 힘내게 하고, 불안을 잠재운다는 것을 안다. 덕후가 되는 날은 여전히 멀어 보이지만 지금의 이 버릇만큼은 평생 고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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