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외국인 파비앙이라는 사람
"오늘 역사 해설해주실 자원봉사자분 곧 오실거예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이내 곧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서양인 한 분이 걸어들어온다. 방송인 파비앙님이었다.
잠시 후 1시간동안 인도, 네팔, 파키스탄, 한국인으로 이루어진 열댓 명 무리가 프랑스인으로부터 한국의 역사를 배우는 묘한 상황이 연출됐다.
(사진출처: Korean Culture and Information Service 공식 유튜브 캡쳐)
2019년 겨울, 외국에서 클라이언트들이 한국을 방문했다. 클라이언트 분들이 한국에 도착한 첫 날은 보통 시차를 적응하거나 오랜 비행으로 쌓인 피로를 풀어야해서 쉬어가는 날로 삼았고 우리는 늘 본격적인 일정이 시작하기에 앞서 워밍업으로 생각해 클라이언트 분들에게 광화문 앞에 있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한국의 발전 역사를 보여주고 저녁엔 경복궁과 인사동 일대를 함께 걸었다.
이 때 회사에서 인도, 네팔, 파키스탄에서 온 클라이언트들이 히말라야에서 발생하는 쓰레기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관광수익을 극대화시킬 것인지 그리고 히말라야를 둘러싸고 있는 각각의 국가들이 어떤 통일성 있는 관리 정책과 프로그램을 만들어야하는지 분석이 이루어지는 중이었다. 그래서 각 국가 환경부나 히말라야 지역에 있는 지자체 공무원들이 우리나라 폐기물 관리 정책을 공부하고 관련 시설을 견학하기위해 한국을 왔다.
알아두면 쓸데있는 환경 지식: 산악지대에서의 폐기물관리는 일반 평지에서 발생하는 폐기물 관리와는 수집과 이동 측면에서 굉장히 다르다. 특히 이 3개 국가의 경우 히말라야 방문객을 통해 얻는 경제수익이 각 국가 관광업 수입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올바른 폐기물 관리를 통한 히말라야 자연보존이 굉장히 중요한데 이들 모두 히말라야에서 발생하는 폐기물을 관리하는 제도가 거의 전무했던 실정이라 각 환경에 맞는 적절한 제도를 설립하는게 매우 필요했다.
그 날도 역시 본격적인 일정을 시작하기 전 클라이언트 분들을 데리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향했다. 여느때와 같이 해설사분을 기다리고 있는데 조금 낯익은 분이 들어왔다. 방송에 많이 알려진 프랑스인 파비앙님이었다. 순간 1,2초 벙쪘고 상황파악을 위해 물었다. 사실 파비앙님을 TV에서 스치듯 봤을 뿐 이분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어서 그가 한국문화와 역사에 이토록 진심인 분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오늘 역사 해설해주시는 분 맞으세요?"
"네, 제가 오늘 역사 설명해드릴 예정입니다."
역사의 흐름대로 박물관 이쪽 끝부터 저쪽 끝까지 그를 따라다니며 해설을 듣기 시작했고 클라이언트분들은 자연스럽게 그에게 추가적인 질문들을 이어나갔다. 나도 질문했고 파비앙님은 대답했다. 영어로 설명하던 그가 틈나면 나에게는 사자성어를 섞어서 한국말로도 설명해주었는데 그 중 심지어 내가 못 알아듣는 것도 있어서 그것마저 풀이해서 설명해 주었다. 다소 민망하긴 했지만 일제강점기 시절의 이야기를 할 때는 약간의 분노를, 전례없는 한국의 빠른 경제성장을 설명할 때는 빛나는 눈동자로 신이나서 설명하는 그를 옆에서 바라보며 속으로 내내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는 단순히 역사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어두웠던 과거와 아픔을 딛고 눈부신 성장을 이룩하는 기쁜 역사에 공감을 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여러 감정들이 스쳤고 자기 전까지 한참을 파비앙님에 대해 검색했다. 그렇게 나는 파비앙님의 팬이 되었다.
태국에 오고 부쩍 한국에 살고있는 외국인 친구들 생각이 많이 난다. 국제대학원 다니던 시절에 만나 2년동안 함께 고생한 내 동기들, 미군시절 한국에서 군복무를 할 당시 한국의 매력에 빠져 전역 후 다시 돌아와 한국에서 석사를 하고 지금은 북한인권관련 일을 하는 친구, 뉴욕에서 연기를 했고 수차례 직업을 바꾼 후 돌고돌아 지금은 서울의 모 대학교 교수로 있는 친구, 그리고 본부에서 한국오피스로 오게된 지난 나의 회사 동료들. 눈동자와 피부색은 다르지만 날이 좋을 땐 한강에서 먹는 치맥이 떠오르고 고기 먹을 땐 꼭 깻잎에 싸서 먹는 친구들이다. 이들 한 명 한 명의 얼굴이 차례대로 스친다. 정확히는 그들이 한국에 살면서 부딪히는 어려움들에 대해 토로할 때의 장면들이 스친다. 그때 나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더라. 태국에서 외국인 거주자된 현재의 내가 그 때를 다시 떠올린다.
모두가 예상가능하듯 외국인으로서 타지에 살면 일상에서 겪는 어려움들이 많다. 대표적으로 언어가 안 통할 때나 보안이 철저한 한국 은행업무를 원격으로 처리할 때가 그렇다. 그 중 생각지도 못 한 일이라 나를 당황시킨 점은 한국번호로 가입한 온라인 사이트들에서 뭔가 하려고 하면 인증문자가 이미 정지되어버린 한국번호로 간다는 것이다. 이들 중 몇몇은 인증수단으로 이메일 옵션조차 없어서 여간 불편한게 아니다. 예를 들면 넷플릭스가 그러한데 덕분에 태국에 오고 나서 성인인증 문자를 못 받는 나는 18세 이상 연령제한이 걸린 영화나 드라마를 못 보고 있다. 하지만 이런 사례들은 조금의 인내를 가지고 시간을 투자하면 해결가능한 불편함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사소한 불편함들을 해결하고 나면 마치 퀘스트를 깬 것 같은 쾌감이 들 때도 있다.
이것 이상으로 타지에 사는게 정말 보통일이 아니구나, 라고 느끼는 순간은 늘 예상치 못 한 순간에 뜬금없이 찾아오는데 대게 이것들은 진한 여운까지 동반하기 때문에 한동안은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게 만든다. 바로 군중 속 외로움이나 소외감을 느끼는 순간들이다. 이런 감정을 느끼는 순간들은 민망할 정도로 별거 아닌 너무도 평범한 일상의 상황 속에서 벌어지기 때문에 일일히 기억을 들추어 말하기도 멋쩍다. 가령 무리 속에서 나빼고 그들만이 공감하는 정서가 있어서 혼자 웃음포인트 못 찾고 웃을 타이밍을 놓친다거나 굳이 의도된 것은 아니지만 나만 대화에 못 끼는 경우가 그렇다. 보통 언어장벽이나 특정 대화소재로 인해 빚어지는 경우다.
외국인 거주자들에게 커뮤니티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현지 사람들과 어울리는 로컬 커뮤니티와 같은 외국인 거주자로서 공감대 형성을 할 수 있는 글로벌 커뮤니티. 서울에 오래 거주하는 외국인 친구들도 보면 한국사람들과 어울리는 친구무리가 있고 본인과 같은 국적이 아니더라도 외국인이라는 동질감때문에 자연스럽게 외국인들끼리 모여서 형성되는 글로벌 친구들 무리가 있다. 그들은 그 안에서 끈끈한 유대관계를 형성한다. (+ 한국사람들에게는 타지에 있는 한국인 커뮤니티도 추가될 것 같다)
나의 경우 치앙마이 라이프 ver.1에서는 하우스메이트들과 거의 모든 시간을 보내느라 사실 이곳에서 현지 친구들을 사귈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ver.2에서는 두 개 커뮤니티 사이에서 조금 더 밸런스를 맞춰가려 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무에타이 체육관에서 사귀는 친구들이 요즘 내 마음 한 켠을 든든하게 만들어주는 로컬친구들이 되어주고 있다. 로컬 커뮤니티에 조금 더 흡수되려면 무엇보다 그 나라 언어와 문화를 익히면서 이들의 정서를 더 깊숙히 이해해야하는데 성조가 있는 태국어가 어렵다는 이유로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태국을 너무 좋아하지만 로컬과 글로벌 두 축 사이에서 여전히 글로벌 커뮤니티에 치우쳐 머물고 있는 나. 물론 완전한 로컬이 될 수는 없겠지만 장기체류자라면 어느정도 둘 사이 간격은 줄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로컬커뮤니티에 굉장히 잘 흡수되된 내 외국인 친구들과 파비앙님이 떠오른다. 한국이 좋아 한국어와 역사를 공부하고 기꺼이 자신의 comfort zone을 떠나 낯선 곳에 새 둥지를 튼 사람들. 얼마 전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친구 중 한 명에게 오랜만에 연락을 했다.
"내가 태국에 와보니 그 동안 너가 한국에서 겪었을 사소한 불편함부터 정착하기까지 있었던 고충들을 이제 좀 알 것 같아"
"하하, 그렇지! 외국인 거주자가 된다는건 완전히 다른 세상을 경험하는 일이야!"
최근 MBC <나혼자 산다>에 파비앙님이 출연해서 반가운 마음에 방송을 챙겨봤는데 비자를 갱신해야할 때마다 이민국을 가야하는데 그 생각만해도 밥도 안넘어가고 숨도 안쉬어진다는 파비앙님 말에 가슴이 미어졌다. 네이티브 스피커인 우리도 잘 모르는 '천착'이라는 단어를 구사하고 한국역사에 공감하고 울분을 토하는 그가 여기까지 오기까지 겪었을 고충은 절대 상상도 못 할 거다.
언젠가 한국 영주권을 준비하는 미국인 친구 C가 이런 말을 했다.
"길가다가 모르는 사람이랑 부딪혔는데 순간적으로 그 사람들이 죄송합니다, 가 아니라 sorry라고 할 때마다 기분이 좀 별로야. 나도 한국말 할 줄 아는데 내 겉모습만 보고 당연히 영어밖에 할 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그 분은 너를 배려해서 그런거야,라고 위로해 주었는데 그 때는 사실 이 친구가 왜 기분나빠하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그 뒤로 방송에 나오는 외국인분들로 부터 비슷한 장면들을 목격했다. 가령, 블랙핑크 멤버 리사가 다른 멤버들이 외국인이라고 하니까 외국인이라고 자신을 부르지 말라며 뾰루퉁한 표정을 짓는다던가 내가 즐겨보는 유튜브 <354 삼오사>에서 누군가 비정상회담 멤버들에게 "외국인분들은 드시기에 어떨지 모르겠는데.."라고하니 바로 "여기 외국인이 어디있어요?"라고 맞받아치는 장면.
생각해보니 나도 이들의 입장이었던 때가 있었다. 에티오피아 살 때 버스에서 승차도우미가 너는 외국인이니까 돈을 더 내라며 기존 버스비의 5배를 부르는 것이었다. 너무 화가나서 실컷 항의하고 결국 버스에서 내려 오기로 집까지 먼 길을 울면서 걸어간 적이 있다. 사실 워낙 버스비가 싸기 때문에 5배라고 해도 큰 돈은 아니었지만 돈보다도 그들이 나를 이방인으로 대하는 것이 서운해서 괜한 오기를 부렸던거다. 산지 1년 가까이 될 시점이라 어느정도 그 나라 말과 문화가 몸에 베어있었고 그 시점에는 특히 에티오피아에 대한 애정이 더 커져있었던 때였다. 그런 나를 여전히 자기들 영역에 포함시켜주지 않는다는 사실에 마치 나는 어디에도 낄 수 없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13년을 한국에서 산 파비앙님도 다른 내 친구들도 한국에 사는 동안 얼마나 많은 외로움을 감당해야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에 대해 더 알아가려고 하는 이 친구들의 태도가 더욱 값지고 귀하게 다가오는 날이다. 요즘 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더 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데 지식습득 이상으로 나는 이들의 역사와 문화에 진심으로 공감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