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_025]두 번째 할아버지 시작

by 여상욱

이른 아침 시간, 거실 벽에 2줄로 걸린 손자의 첫돌 사진을 쳐다보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작은아들의 조금 흥분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쏟아졌어요. "아빠, 지금 막 낳았어요. 3.2킬로, 산모도 건강해요." 떨리는 목소리 뒤로 아기 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둘째 손자를 새로 맞아 한 번 더 할아버지가 되는 나의 만면에 미소가 번졌습니다.


며느리가 병원에서 산후조리원으로 옮겨 2주일이 지난 뒤 드디어 손자가 집으로 왔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병원에서 백일해 주사를 맞고 아내와 함께 손자를 보러 갔어요.


집의 현관 문이 열리자 할아버지, 할머니와의 첫 대면을 기다렸다는 듯, 아이는 강보에 싸인 채 팔다리를 저으며 우리를 반기는 것 같았습니다. 막 잠에서 깨어났는지 게슴츠레한 작은 눈으로 우릴 보는 듯했습니다. 머리맡에 놓인 달력엔 '23'자가 쓰여 있었습니다. 아내가 한참을 안고 있다가 내 품에 넘겨 주었습니다. 아직 목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므로 조심스레 한 손을 목덜미를 받히고 눈을 맞추었어요. 많이 누워 있어서일까요. 아이는 할아버지 손바닥 위에서 목을 이리저리 돌렸습니다. 엄마, 아빠 그리고 산모 도우미만 보다가 처음으로 낯선 사람을 만난 것이지요. 작은 손자와 할아버지와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엄마 뱃속을 떠나 처음으로 세상 여행을 한 아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손발과 팔다리 움직이고, 배고프거나 졸릴 때, 그리고 아플 때 우는 게 전부였습니다. 시작은 본능적이었지만, 손자 한 사람의 출생이 맺는 가족 관계는 적지 않았어요. 엄마, 아빠와 부모 자식 관계. 할머니, 할아버지와 조손 관계. 큰아빠, 큰엄마와 백부모와 조카 관계... 외가 쪽으로도 외조부모와 외손 관계부터 이모, 외삼촌....


꽃이 세계를 아름답게 하려고 피어나는 건 아닐 것입니다. 꽃은 피어나서 세상에 깔린 더러움과 지겨움을 씻어버리고 세계와 출생의 기쁨을 나눕니다. 그러나 흐드러지게 꽃들이 피어도 봐주는 눈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꽃은 예쁘게 봐주는 눈이 있을 때 예쁩니다. 여기서 만남이 시작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도 꽃처럼 기쁘게 맞아주고 대해 주어야 세계와 올바른 관계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손자가 시작하는 세상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손자의 첫 시작이 할아버지에게는 다시 시작하는 시간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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