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선택-화법] 침묵을 선물한 자리

아이는 자신의 메아리를 즐기고 있다.

by 상처입은 치유자

5시 22분. 주차를 하고 시간을 확인한다.


5분만 있다가 가자. 운전석의자를 한껏 뒤로 젖히고 눈을 잠시 감는다. 손가락 끝이 간질간질하다.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난다. 배는 지금이라도 일어나서 집으로 들어가 음식을 넣으라고 재촉하지만 내 몸은 말을 듣지 않는다. 심지어 눈을 감고 모른척하고 있다.


5분만.


5시 26분. 아까의 뻔뻔함은 4분 만에 끝났다. 1분 전인데 벌써 내 몸이 튀어나가려 움찔거린다. 아직은 나에게 5분이라는 시간도 길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침묵을 선물하기로 한 순간부터 나에게 의식이 생겼다. 퇴근 후 기어를 P에 놓고 사이드를 채우자마자 튀어나갔던 나는 나를 천천히 다룬다. 이렇게 하면 침묵을 위한 에너지를 얻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서류가방, 도시락가방, 스텐 물병을 주섬주섬 주워 들고 문콕을 조심하려 문을 3분의 1 정도만 연다. 왼손으로 차 문을 움켜쥐고 몸을 비스듬하게 틀어 본다. 숨을 최대한 들이마신 내 몸이 가까스로 빠져나온다. 오른손에 들린 물건들을 문에 닿지 않게 차 천장 쪽으로 최대한 들어 올려 조심스럽게 빼낸다.


오늘도 안전하게 벗어나기 성공.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발걸음이 빨라진 건 이제야 꼬르륵 명령을 들었기 때문이다. 아니면 그냥 습관인지도 모르겠다.


내 눈에 빨간색 '13'이라는 숫자가 유난히 선명하게 들어온다.

'13층. 지하 1층까지는 14층이나 내려와야 하잖아!!'

고새를 못 참고 핸드폰을 들어 유튜브 숏츠를 튼다. '먹방브이로그'


문 앞에 서서 한숨을 쉬고 눈에 웃음기를 머금는다.

'삐삐 삐삐삐~'

"엄마 왔다~ 우리 *** 오늘도 애썼다. 저녁 뭐 먹을까?"

아이한테 하는 말인지 나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말로 아이의 존재를 맞는다.


나를 맞는 아이는 친절한 말과 모진 말로 번갈아 반응한다. 나는 언제나 설레는 맘으로 반응을 기다리고 있고. 아마도 이 침묵을 엄마의 벌로 봐야 할지 자신을 위한 무대로 봐야 할지 헷갈려서 확인 중인가 보다.


이 침묵의 의미를 곧 알게 될 테니 나는 굳이 말로 설명하지는 않으려 한다. 나에게도 어색한 이 침묵을 말로 설명한다는 게 우습기도 하고, 말로 내뱉으면 그동안 먹었던 마음과 계획이 모두 흐트러질 것 같아 조심스럽다. 내가 할 일은 묵직한 산처럼 그곳에서 아이를 응원하는 것일 것이다.


[3초의 법칙]을 고안해 내고 나서 나에게는 변화가 생겼다. 3초 안에 감정을 알아주고 말을 끝낸다. 지금까지는 쏟아내기만 했던 말들을 대부분 침묵 속에 넣어 여미는 것이다. 산 되기.. 갈 길이 매우 멀다.


그래서인지 말을 할 때 마치 홀로그램처럼 내 눈앞에 숫자가 나타난다.

초록색 1, 노란색 2, 빨간색 3

누군가 규칙을 알려주듯, 3초 안에상대가 원하는 대답만 하기. 그리고 침묵.


아이는 그 빈 공간에 자기의 목소리를 조금씩 내어 놓기 시작했다. 나의 목소리를 지운 자리에 자신의 메아리까지 들여다 놓았다. 아이는 제 모습을 찾아가는 중이다.


나는 여전히 불안하다. 나의 불안은 말을 출발시키는 습관이 있다. 어디까지 말을 하고 어디까지 여며 둬야 할지 침묵 속에서 매우 분주하게 보낸다.


그 침묵 속에서 배는 울렁거리고 심장은 내리막길을 빨리 내려갈 때처럼 아리다. 이렇게 나의 불안은 매우 선명하고 명징하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곤 한다. 나를 유혹한다.


"오늘만 딱 한번 말하는 거야.. 한 번이잖아"

무슨 다이어트는 내일부터도 아니고.. 인간관계에서 한 번이 무서운 거다.


용케 말을 잘 참아낸 날은 편안하게 몸을 뉘어 불안을 똑바로 바라본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말한다.

"내가 이겼어."


하지만 나라고 매일 이길 수 있겠는가. 불안과 싸울 힘이 없어져 버린 날엔, 잰걸음으로 집안을 돌아다닌다. 불안이 뱉어버린 말을 쓸어 담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그리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 인간은 전두엽의 사고능력을 선물 받은 대신 실수를 통해 배워야 하는 형벌도 함께 받은 것 같다.


'엄마는 화가 난 게 아니야. 너에게 무대를 선물한 거야. 이 무대가 선물이 아닌 벌처럼 느껴졌다면 그것은 너의 자유가 들어오지 못하게 한 엄마 탓이야. 그래서 만회하려고 해. 엄마도 인간이라 항상 잘할 순 없겠지만, 최선을 다하고 있어.'


눈빛에 말을 담아 보낸다.


침묵 속에 나의 눈빛이 아이에게 크게 들리길 바랄 뿐이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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