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사랑이에요.
마트에 들어서자마자 채소칸을 훑어본다. 채소칸이 입구 쪽에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나이가 들면 채소를 먹어야 한다'가 절대법이라도 되는 양 카트를 끌고 간다. 굉장한 중력이다.
겨울엔 시금치라는 이름 대신 섬초라고 불리기도 하는 게 나온다. 추운 겨울 땅의 기운 중에 단맛만 뽑아 올렸는지 무쳐놓으면 달큰한 맛이 뭉근하게 올라온다.
메트로놈 박자에 맞추듯 시금치나물을 아작아작 씹을 때마다 나오는 채수의 단맛을 우리 식구는 아주 좋아한다.
그럼에도 시금치 한 단을 잡고 카트에 넣을지 말지 고민하고 있는 건, 아마도 씻어야 하는 수고가 머리를 스쳤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겨울 찬물은 피하고 싶다.
냉이나 시금치는 하찮은 결과물에 비해 그 과정이 좀 귀찮다. 특히 흙을 깨끗하게 털어내야 한다는 점에서.
섬초는 뿌리가 두툼한데 그 부분은 달큰해서 포기할 수 없다. 두툼한 뿌리 부분의 줄기에 흙이 구석구석 끼어있어 씻을 때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정말 귀찮을 땐 뎅강 잘라 버린다. 단맛을 포기하고 효율을 선택하는 것이다.
친정 엄마에게 배운 대로 뿌리를 칼로 살살 긁어 흙이 묻은 껍질을 벗겨낸다. '그래도 냉이보다는 낫지.'라고 읊조리면서 말이다.
문득 '왜 이 귀찮음을 굳이 견뎌내면서 시금치를 먹어야 하는 걸까.' 라며 의문이 들었다. 반찬가게에서 사 먹거나 '우리 집에 시금치는 없어!', '먹고 싶은 사람이 씻어와!' 이러면 될 것을.
시금치는 흙에서 자랐다. 이제 시금치나물로 차원을 바꾸려니 그 흙을 털어내야 한다. 그렇게 흔적을 털어내서 다른 모습이 된다. 물론 시금치에게 나물이 되고 싶냐고 물어본 적은 없다.
아이는 내 품에서 나왔다. 엄마가 한번 봐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저 바라봐주는 것만으로 흙에서 잘 자라고 있던 아이는 나의 흔적을 모두 떨어내려고 한다. 다른 모습이 되겠다며.
나에게서 벗어나는 아이를 바라보는 것도 모자라, 그것을 도와줘야 하는 엄마가 되는 과정이 수고스럽다. 겨울 찬물에 손이 아리도록 시린 과정이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에게 맡기기도 싫다. 맡길 수도 없고. 내 손으로 아이의 독립을 도와주고 싶다. 가슴에 찬물이 덮쳐와 아리더라도.
이 과정이 수고스럽다고 시금치 뿌리를 잘라버리듯 하면, 아이의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는 달달한 경험을 못하겠지.
세상에 그냥 얻어지는 게 없구나 하며, 시금치에 소금하고 들기름을 뿌린다. 고소한 냄새에 잊고 있던 허기가 올라오는 것 같다. 달큰한 시금치를 저녁 상에 올리고 맛있게 먹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