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나의 독립선언 일지도 몰라.
"아이의 감정쓰레기통이 되려던 것은 나였어."
어린 시절, 엄마가 설거지하는 뒷모습이 어제보다 얼마나 더 처졌는지를 알아채고, 그 차이만큼 불안해했었다. 수화기로 전해오는 목소리의 작은 떨림도 내 심장은 들었고, 걸음걸이를 보고 상대의 기분을 냄새 맡았다.
그 불안을 해결하지 못한 채, 나는 그렇게 엄마가 되었다.
불안을 아이가 겪지 않게 하고 싶었다. 매 순간을 불안의 떨림과 함께 느낀다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웠으니까.
아이의 주위에서 아이가 스스로 세포에 새겨야 할 불안을 낚아채서 나에게로 가져왔다. 그게 나에게는 사랑이었다.
아이가 그 공포에 질린 울음을 토해냈을 때, 그것은 어린 시절의 나였다.
"엄마에게 다 토해내. 엄마가 다 처리할게."
그 순간 나는 스스로 감정쓰레기통이 되었다. 지독한 냄새를 참기로 했다. 어린 시절의 나를 향한 위로였다.
그러나 내가 그만두기로 한 것은, 내 쓰레기통이 가득 차 아이를 보고 웃지 않는 나를 발견하고부터 이다. 이 모습을 보는 아이를 상상하는 게 소름 끼치게 두려웠다.
내 손으로 바로잡자 했다. 내 불안이 이 아이를 고통스럽게 한 것이니까.
"엄마는 자격이 없어."
이 아이에게 엄마의 자격이란 무슨 감정이든 자기 입맛에 따라 받아주는 것이었다. 엄마가 그 역할을 거부하자 진상 고객이 된 것이다. 누굴 탓하랴. 네가 그렇게 느끼게 한 어미 잘못이지.
"엄마에게 서운할 수는 있어. 그리고 엄마는 최선을 다했어. 엄마가 자격을 찾아가는 중이야."
하고 소리 지르는 아이를 뒤로 한채 문을 닫고 나왔다. 업무 종료가 실제 시작됐다.
아이가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악다구니를 쓰며 모진 말과 함께 울음을 뱉어냈다. 이내 아이의 울음은 흐느낌으로 바뀌었다. 서비스 종료에 대한 아쉬움과 슬픔이 큰가 보다.
어느 정도 울음이 끝났을 때 말없이 문을 열고 들어가 눈물을 닦아주고, 물을 주었다. 슬픔은 더해져 울음은 커졌지만, 헤어짐과 스스로 책임져야 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커졌나 보다. "마음껏 울어도 돼"
아이를 안아주며 말했다.
"고생했다. 힘들었지? 엄마는 널 미워하지 않아. 그리고 네가 멋지게 독립할 수 있게 엄마는 도와줄 거야. 그렇게 멋진 독립을 할 때까지는 잘 살아보자."
토닥토닥.
아이는 방으로 들어가며 애먼 앵무새에게 화를 냈다.
"시끄럽다고!"
그제야 자기 행동이 생각나 민망함에 새어 나온 말이었다.
내가 느낀 고통을 아이도 똑같이 느낄 것이라는 착각, 내가 아이의 불안을 해결할 수 있다는 오만 그리고 감정쓰레기통이 되겠다는 잘못된 신념이 아이를 고통스럽게 했다.
하지만 나는 선언한다.
"고객님, 감정쓰레기통 서비스가 종료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스스로 처리하십시오."
이 아이의 멋진 독립을 믿으며, 나도 하나씩 아이의 흔적을 떼낼 것이다. 아프다. 원래 새로 태어나는 것은 그러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