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리즘의 효율성이 지워버린 '나'라는 노이즈를 찾아서
퇴근길 지하철, 습관처럼 음악앱을 켭니다. '당신의 저녁을 위한 믹스'가 이미 대기 중입니다. 첫 곡을 듣자마자 고개를 끄덕입니다. 넷플릭스를 켜도 마찬가지입니다. '98% 일치'라는 초록색 숫자가 나를 안심시킵니다. 실패할 확률은 제로에 수렴합니다.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편리한 '취향의 외주화(Outsourcing)'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거대 언어 모델과 추천 알고리즘은 나보다 내 취향을 더 잘 분석합니다. 내가 과거에 무엇을 클릭했는지, 어떤 이미지에 3초 이상 머물렀는지를 데이터로 축적하여, 내가 '좋아할 수밖에 없는' 것들만 눈앞에 대령합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이 완벽한 편리함이 거대한 감옥처럼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알고리즘은 나의 '과거'를 기반으로 나의 '미래'를 재단합니다. 그 안전한 루프 속에서 나는 영원히 비슷한 노래를 듣고, 비슷한 장르의 영화를 보며,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글만 읽게 됩니다. 취향이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 데이터 속에 갇혀 좁아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감각은 내 것인가, 아니면 데이터가 학습시킨 결과값인가?"
#1 알고리즘은 '노이즈'를 혐오한다
AI와 플랫폼의 목표는 명확합니다. 사용자의 '이탈'을 막고 체류 시간을 늘리는 것. 그러기 위해 그들은 **'마찰(Friction)'**을 제거합니다. 낯설거나, 불편하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콘텐츠는 효율적인 소비를 방해하는 '노이즈'로 분류되어 내 타임라인에서 조용히 삭제됩니다.
하지만 예술적 경험의 본질은 종종 그 '마찰' 속에 숨어 있습니다.
제가 미술관에서 큐레이터로 일하며 배운 가장 중요한 교훈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좋은 성과를 내고 관람객을 늘린 비결은 역설적이게도 '편한' 전시를 기획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대중이 좋아할 만한 '안전한' 작품만 선별했다면, 그저 평범한 미술관 중 하나로 남았을 겁니다.
대신 우리는 관람객을 때로는 불편하게 만드는 작품, 첫눈에 이해되지 않는 작품, 기존 취향과 충돌하는 작품을 의도적으로 배치했습니다. 처음 들었을 땐 난해해서 미간을 찌푸렸던 음악이 1년 뒤 내 인생을 지탱하는 BGM이 되기도 하고, 우연히 잘못 들어선 골목길에서 평생의 단골 카페를 발견하기도 하듯이. 진정한 취향은 매끄러운 추천 목록이 아니라, 울퉁불퉁한 우연과 오해, 그리고 낯선 충돌 속에서 발견됩니다.
#2 알고리즘 안에서 알고리즘을 배신하다
저는 지금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며 매주 음악을 업로드합니다. 구독자들이 제 채널을 찾는 이유는 분명 유튜브 알고리즘 덕분입니다.
하지만 저는 의도적으로 알고리즘이 선호하지 않을 실험을 합니다. 유튜브가 "8분 이상의 영상이 좋다"고 권장하면 3분짜리 곡을 올리고, 트렌디한 K-pop 스타일이 조회수를 보장한다는 걸 알면서도 실험적인 앰비언트 사운드를 시도합니다. 알고리즘이 예측한 '성공 공식'을 따랐다면 구독자는 더 많았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건 제 채널이 아니라, 알고리즘이 원하는 채널이 되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빵 굽기와 같습니다. 레시피 앱이 알려주는 대로 재료를 정확히 계량하고, 온도와 시간을 지키면 실패 확률 0%의 빵이 나옵니다. 하지만 할머니가 감으로 반죽하고, 그날 습도를 느끼며 굽는 빵에는 레시피가 포착할 수 없는 '손맛'이 있습니다. 저는 AI 도구를 쓰지만, 알고리즘이 제안하는 '완벽한 레시피'를 거부하고 제 손맛을 섞는 작업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부터 **내 취향의 '편집권'**을 되찾기로 했습니다. 알고리즘이 매끄럽게 큐레이션 해준 세계가 아니라, 내 삶의 경험을 날것 그대로 직접 수집하겠다는 선언입니다. 방법은 간단합니다. 추천된 세계를 '배신'하는 것입니다.
#3 실천: 알고리즘을 배신하는 3가지 방법
1. 별점 0개의 세계로 진입하기
맛집을 찾을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별점 높은 순' 필터를 겁니다. 하지만 이번 주말엔 지도 앱을 끄고, 간판의 서체만 보고 식당에 들어가 봅니다.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맛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맛없음'조차 데이터로 걸러지지 않은, 온전한 나의 신체적 경험입니다.
적어도 그 기억은 '별 5개짜리 평균적인 맛'보다는 훨씬 입체적인, 나만의 고유한 데이터가 됩니다. 미술관에서 무명 작가의 실험적 설치 작품 앞에서 당혹스러워했던 관람객이, 2년 후 그 작가의 개인전을 찾아오며 "그때 그 작품이 계속 생각났어요"라고 말할 때의 감동. 그것이 바로 알고리즘이 절대 예측할 수 없는 '별점 0개의 경험'이 주는 선물입니다.
2.'랜덤'이라는 가장 인간적인 저항
서점에서 베스트셀러 코너를 지나칩니다. 눈을 감고 서가에서 아무 책이나 한 권 뽑아 듭니다. 제목도, 작가도 모르는 책의 50페이지를 펼쳐 읽습니다.
유튜브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영상 대신, 검색창에 전혀 상관없는 두 단어를 조합해 검색해 봅니다. (예: "빗소리" + "철학"). 논리적 연관성이 끊어진 곳에서, 우리의 뇌는 새로운 연결을 시도하며 비로소 깨어납니다.
저는 음악을 만들 때도 의도적으로 이 방법을 씁니다. AI가 제안하는 '최적화된' 프롬프트 대신, 서로 어울리지 않는 두 장르를 억지로 결합시킵니다. "그레고리안 성가" + "트랩 비트", "전통 국악" + "신스웨이브". 알고리즘은 이 조합을 비효율적이라고 판단하겠지만, 그 예측 불가능한 충돌 속에서 제 고유한 사운드가 탄생합니다.
3. 싫어하는 것을 '응시'하기
알고리즘은 내가 싫어하는 것을 기가 막히게 숨겨줍니다. 하지만 우리는 반대로 행동해야 합니다. 내가 평소에 "내 스타일 아냐"라고 단정 지었던 음악, 절대 입지 않을 것 같은 색깔의 옷을 일부러 선택해 봅니다.
그리고 질문합니다. "나는 왜 이것을 싫어한다고 믿게 되었을까?"
그 불편함을 응시하는 과정에서 나의 취향은 데이터의 경계를 넘어 확장됩니다. 큐레이터 시절, 저를 가장 성장시킨 전시는 제가 '좋아했던' 작품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어서 괴로웠던' 작품들이었습니다. 그 괴로움을 회피하지 않고 응시했을 때, 비로소 제 안목의 해상도가 높아졌습니다.
#4 나만의 해상도를 되찾는 일
미드저니(Midjourney)가 그려주는 그림은 8K 해상도로 선명하지만, 그 속에는 '나'라는 고유한 필터가 빠져 있습니다. 반면 우리가 직접 발로 뛰며 수집한 취향은 때로는 흐릿하고, 노이즈가 섞여 있고, 투박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진짜입니다.
AI 시대에 인간의 가치는 '생성'이 아니라 '선택'에 있습니다. 하지만 그 선택이 알고리즘에 외주화되는 순간, 우리는 선택하는 주체가 아니라 선택당하는 객체로 전락합니다.
편리한 알고리즘의 추천을 끄고(Off), 불편한 세상의 감각을 켜는(On) 순간. 우리는 비로소 데이터 덩어리가 아닌, 고유한 안목을 가진 한 명의 '큐레이터(Curator)'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