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진화와 게임의 예술성

by 류임상

러시아의 대문호 막심 고리키는 “인간은 그 본성에서부터 예술가이다. 그는 어디서든 어떤 모습으로든 자신의 생활에 미를 도입하려고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본성은 궁극적으로 ‘미’를 추구하며, 그 ‘미’의 종착지는 ‘예술’이라는 것이죠.


우리가 흔히 하는 질문인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명쾌한 답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요? 흥미로운 것은 이렇게 모호하고 정의 내리기 힘든 단어인 ‘예술’을 우리는 너무나도 흔하게 일상생활에서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경기 완전 예술이었어’, ‘어제 네가 끓여준 라면 맛 정말 예술이던 걸?’,‘오늘 날씨 예술이다’... 등등 이렇게 ‘예술’이라는 단어는 ‘예술 작품’을 벗어나 우리들이 즐겨 쓰곤 하는‘일상 단어’가 되어있습니다. 가장 어렵지만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인 ‘예술’. 과연 예술이란 무엇일까요? 거기에 ‘예술의 세계’에 편입되고자 하는 ‘게임’은 정말 ‘예술’일까요.


먼저 하나의 전제를 세워봅니다. 이 글에서는 더 이상 ‘게임이 예술인가’라는 이야기는 나누지 않으려고 합니다. 수년간 소모적으로 다루어졌던 이 이야기는 불필요한 논쟁 만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결론이 나지 않는 평행선의 주장을 벗어나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에 접근해 보도록 하지요. ‘게임’은 예술의 장르가 아니라’ 예술의 진화’ 형태 중 하나라는 전제로 말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이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걸 어떠한 방식으로 던 외부로 표현하고자 하지요. 그 표현에 소위 ‘예술적 행위(글쓰기, 그리기, 표현하기 등)’가 더해지면서 예술은 탄생합니다. 그리고 그 행위를 독창적이며 인상적으로, 멋진 미(美)로 성취한 사람을 우리는 ‘예술가’라고 부르지요. ‘예술’에 대한 편견을 잠시 접어둔다면, 우리가 유, 무형적으로 만들어내는 대부분은 ‘예술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앞서 전재한 ‘게임은 예술인가’란 논쟁이 불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해당합니다. 단지 ‘좋은 예술’과 ‘부족한 예술’, 혹은 ‘예술성이 떨어지는’ 결과물만이 존재할 뿐이지요.


그렇다면 예술은 어떻게‘진화’ 해왔을까요. 물론 여기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종’의 진화 방식과는 다른 패러다임이 존재합니다. ‘종’의 진화는 진화 후 앞의 ‘종’이 퇴화함으로 완성되곤 하죠. 오스트랄로피테쿠스 - 호모 하빌리스 - 호모 에렉투스 - 호모 사피엔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등등으로 이어지는 인류의 진화처럼 말이지요. 하지만 예술의 진화는 이전 ‘종’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예술 고유의 영역을 지키며 남아있고(정체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가 진화-확장합니다) 다른 예술로 그 특성을 ‘파생-전이’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순한 번식의 형태를 보이는 것이 아니지요. 이제 예술이 어떻게 ‘진화’되어왔는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jpg 최초의 이야기 전달자, 상형문자

‘이미지’는 인류가 가장 먼저 이야기를 전달하는 수단이었습니다. 문자의 발명 이전 ‘상형문자’가 존재했듯이 ‘이미지’는 직관적으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었지요. 그렇게 이야기를 담은 ‘그림’은 문자의 발명 이후 ‘회화’라는 형식으로 진화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 메시지를 전달하는 메신저의 역할을 하지 않는 ‘그림-회화’는 어떻게 ‘예술’이 되었을까요?


단순하게 ‘시간을 담아 보존하는’ 기록물로서의 회화 시대를 지나, 그림은 그 안에 이야기를 담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2차원의 평면 속에 많은 내용을 담기란 쉽지 않은 일이지요. 그러다 보니 예술가들은 여러 가지 실험적인 시도로 평면 예술의 한계를 넘고자 합니다. 그 시도에는 시간성에 대한 실험이나, 매체(캔버스)의 한계를 넘는 전위적인 시도, 그리고 표현되는 도구(물감, 붓 등)의 다양화 등등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지점은 바로 ‘이야기’를 담는 그릇으로서의 ‘회화’가 어떤 시도로 ‘기록성’을 넘어’ 예술성’을 지니게 되었는지입니다.

2.jpg 산드로 보티첼리, ‘수태고지’

날개 달린 천사와 한 여인이 그림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천사가 여인을 손으로 가리키며 무언가 말을 건네고 있네요. 이 작품의 제목은 산드로 보티첼리가 그린 ‘수태고지(受胎告知, Annunciation)’입니다. 신약성서에 기록된 내용인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 예수 그리스도 잉태를 예고’한 부분을 그린 이 작품은 수없이 많은 예술가에 의해 여러 가지 형태로 그려지기도 했습니다. 보티첼리에 의해 그려진 이 작품은 손을 살짝 세워 앞으로 내밀고 있어 언뜻 보아서는 거절하는 것 같은 마리아와 아이가 태어났음을 고지하는 천사의 동작이 대비되어 그 감정선이 독특합니다. 단순히 성경에 나온 상황만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황금분할을 이용해 두 인물의 손을 출입문의 수직선에 의해 명확하게 반으로 나누어 두 등장인물 사이에 결코 넘어설 수 없는 거리를 말해주고 있고, 거기에 마음을 알 수 없는 마리아의 표정이나 목적만을 응시하고 있는 천사의 눈빛을 더해 긴장감을 가져다주며, 보는 이로 하여금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상황 외에 여러 가지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해 줍니다.

3.jpg 퐁텐블로 파(작가 미상),’ 가브리엘 데스트레와 그 자매’


루브르 박물관에서 ‘모나리자’만큼 유명한 이 그림은’ 가브리엘 데스트레와 그 자매’인데요. 그림 속의 두 여인 중 오른쪽이 가브리엘입니다. 그녀는 왼손에 반지를 들고 있고 오른손은 욕조에 걸치고 있습니다. 왼쪽 인물은 그녀의 누이 빌라르(Villard) 공작부인으로 왼손으로 가브리엘의 오른쪽 유두를 붙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여인의 뒤에는 하녀가 옷을 만들고 있고 그녀의 오른쪽에는 벽난로에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습니다. 벽난로 위에는 누드의 남성이 하체를 가린 모습의 그림이 보입니다. 이 한 장의 도상 위에 수 많은 이야깃거리가 가득합니다. 그리고 관람자는 그 이유를 흥미롭게 상상하게 되죠. 언뜻 보기에 동성애로 보이는 이 작품은 가브리엘의 임신과 그걸 축하하는 자매의 상황을 여러 가지 단서로 묘사하고 있지요. ‘기록’이 아닌 ‘생각하는 이야기’로 ‘이미지’가 진화한 좋은 사례입니다.


‘좋은 예술’이란 이렇게 상황을 묘사하는 것을 넘어 의도적인 연출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잘 수행했느냐가 중요한 지표가 됩니다. 그리고 그 의도적인 연출은 ‘무언가를 더해서’ 얻어지기보단 ‘잘 빼내었을 때’ 더 잘 성취됩니다. 어떠한 상황에 의도적으로 ‘구멍’을 내고, 그 ‘구멍’을 감상자가 잘 메워서 상상하도록 유도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억지스럽지 않게 감상자가 긍정적인 ‘예술 감상’을 가지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 작품을 ‘예술성이 있다’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미지’의 확장-진화 형태인 ‘게임’은 어떠한 방식으로 ‘예술성’을 확보하고 표현해 나가고 있을까요. 플로렌스(Florence)는 2018년 마운틴 스튜디오 (Mountains studio)에서 개발하고, 안나푸르나 인터렉티브(Annapurna Interactive)에서 발매한 모바일 게임입니다. 만화와 웹 코믹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된 이 게임은 마치 한 편의 애니메이션을 보는 듯 전개되는데요. 즉 플로렌스는 게임과 영화, 애니메이션의 장점을 두루 가진 새로운 형태의 예술성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4.jpg 마운틴 스튜디오, ‘플로렌스(Florence)’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여주인공 플로렌스는 우연히 거리에서 첼로를 연주하는 크리시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그들의 풋풋한 첫 만남부터 사랑의 설렘, 소소한 다툼, 그리고 이별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드래그와 터치 등 단순한 조작으로 구성된 단편 미니게임들로 진행되죠. 간단하게 반복되는 조작이지만 설명을 최소화하여 감상자들이 여러 가지 시도를 하게 함으로써 몰입감을 최대화하고, 일러스트로 채워진 장면 속에서 저마다의 경험을 끌어와 각기 다른 감정을 이입시킬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5.jpg 플로렌스의 대화 방식

특히 플로렌스와 크리스의 대화를 처리한 방식이 흥미로운데요. 이 게임에서는 두 사람의 대화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단지 말풍선과 그것의 모양, 색, 개수 등으로 대화의 내용을 짐작할 뿐이지요. 처음 만난 둘의 대화는 참으로 조심스럽습니다. 하나하나 신중하게 대화를 이어 나가게 됩니다. 그러다가 두 사람의 사랑이 무르익게 되면 말 조각이 큰, 다시 말해 여러 말이 필요 없는 사이라는 걸 시각적으로 보여주고 있지요. 재미있는 건 둘 사이가 안 좋아졌을 때입니다. 엄청나게 많은 말풍선과 자극적인 색이 오고 가지요. 꼭 내용을 보여주지 않더라도 두 사람의 감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게임의 주된 내용은 플로렌스와 크리시의 사랑 이야기지만 궁극적으로 관계 속에서 성장하고 있는 플로렌스의 성장 스토리를 경험해 볼 수 있습니다. 게임이 끝나고 나면 해냈다는 뿌듯함보다는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본 것 같은 여운과 함께, 플로렌스의 이야기 속에서 어느덧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돌아보는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지요. 이는 다른 예술(책, 회화, 영화….)들이 주는 감동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수용방식과 감상의 형식인지를 뿐, 그것이 주는 ‘예술 경험’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수용방식과 감상의 형식이 달라진 건, 단지 기술의 발전에 의한 매체의 변화뿐만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감상자의 ‘진화’에 발맞춘 거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체험’하고 ‘경험’을 공유하길 더 좋아하는 새로운 ‘예술 감상자’들의 등장 말입니다.


해묵은 논쟁을 다시 한번 꺼내 봅니다. ‘게임은 예술’일까요? 노동자들의 단순 오락 거리였던 영화는 처음부터 ‘예술’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모든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모습으로 ‘진화’하여 새로운 ‘종합예술’의 호칭을 가지게 되었지요. ‘게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게임이야말로 책, 음악, 영화, 회화, 뮤지컬까지 모든 장르의 예술을 아우르는 진짜 ‘종합예술’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게임 역시도 앞으론 새롭게 ‘진화’하여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형태가 될 수도 있겠지요. 그렇다면 지금 21세기의 감상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논쟁을 치우고 이 새로운 예술을 흥미롭게 감상해 나아가야 할까요, 아니면 여러 가지 규제를 통해 그 발목을 붙잡고만 있어야 할까요?


* 2020년 게임문화재단 게임리터러시 교재를 위한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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