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왜 커뮤니티의 분노를 빌려 쓰는가

by 태이

최근 한 온라인 남초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된 글을 보았다. 자신을 고등학교 1학년에 올라가는 학생이라 소개한 글쓴이는 분노에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연애 시장에서 잘난 것 없는 비기득권 베타메일”로 자신을 규정하고 그러한 자신의 저치가 불공평하고 부정의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불평등을 끝내기 위해 ‘섹스세 부과’, ‘섹스 추첨제 도입’, ‘혼전 성관계 금지법’ 같은 정책을 열거하며 “도태한남당을 창당하겠다”라고 선언했다. 얼핏 보면 유머처럼 보이지만, 그 글 속에는 뚜렷한 감정이 자리하고 있었다. ‘왜 나는 연애 시장에서 선택받지 못하는가?’에서 촉발된 분노는 “그러니 너희도 못 가져야 공정하다”는 식으로 뒤틀려 있었다.



‘소년의 시간’과 인셀, 감정에서 폭력으로 흐르는 서사


넷플릭스 드라마 《소년의 시간》(2025)은 바로 이런 감정을 다룬다. 영국의 한 학교에서 13세 소년이 동급생 소녀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된다. 사건의 진상을 추적하는 과정을 통해 드라마는 인셀 문화에 대해 생생하게 묘사한다. 스스로를 인셀(‘비자발적 독신주의자(Involuntary Celibate))이라 부르는 이들은 연애나 성적 관계에서의 무경험을 개인의 문제로 보기보다 여성과 알파남이 독점한 불공정한 구조 때문이라 말한다. 그리고 ‘연애는 경쟁이고, 성은 배급해야 할 자원’이라는 전형적인 여성혐오적 사고방식을 공유한다. 《소년의 시간》 속 소년이 임상심리학자와 대화하는 장면과 남초 커뮤니티의 게시물 모두 이러한 세계관을 뚜렷이 보여준다. 그들에게 여성은 마땅히 소유해야 할 대상이며 그렇지 못할 경우 기꺼이 폭력을 행사해도 되는 존재다.



알파남 되기 프로젝트


사실 우리 사회는 이미 그들에게 온건한(?) 해결 방법을 제시한 적이 있다. 그 대표적인 예시가 자기계발이다. 대한민국 남성들은 연애와 섹스에서의 거절과 실패를 극복 또는 예방하기 위한 대안으로 몸을 가꾸고 돈 버는 능력을 키우는 것에 집중해 왔다. 내가 여성을 가질 수 없는 이유는 “내가 아직 덜 성공했기 때문”이라는 사고방식 때문이다. 그래서 헬스장에 등록해서 근육을 키우고 돈을 벌기 위한 각종 재테크 수업에 기꺼이 거액을 투자해 왔다.


이런 흐름에 기름을 끼얹으며 불을 붙인 유명인들이 있다. 바로 조던 피터슨과 엔드류 테이트다.. 조던 피터슨은 남성들이 사회적 위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그는 여성의 사회적 진출과 페미니즘을 남성성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며, 남성들에게 자기계발을 통해 기존의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라고 권장한다. 앤드류 테이트 역시 남성들에게 경제적 성공과 지배적인 남성성을 추구하라고 독려한다. 전통적 남성성을 회복하고 위계를 지켜야 하며 여성은 순종하고 남성은 지배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메시지는 남성들에게 알파메일이 되지 않으면 존재할 자격이 없다고 말한다. 감정을 표현하는 대신, 성취·지배·효율만이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그렇게 돈과 시간과 자본을 쏟아부은 끝에도 실패를 경험하게 되면, 그 분노는 자기 성찰이 아니라 타인을 끌어내려 공격하고 싶은 충동으로 향한다. 결국 그 분노는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증폭되고, 때로는 극단적 사고로 발전하기도 한다. 앞서 언급한 고등학생의 게시글과 <소년의 시간>도 이 같은 정서가 반복적으로 학습되고 재생산되는 현실을 보여준다.



정치가 커뮤니티를 쫓기 시작할 때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충동이 정치에 흡수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몇 년 사이 주요 정치인들은 남초 커뮤니티에서 만들어진 정서를 직접 정치에 끌어와 활용해 왔다.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는 2022년 대선 당시 윤석열 후보가 내세운 ‘여성가족부 폐지’ 공약이다.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는 발언과 함께 등장한 이 공약은, 당시 20대 남성 지지율을 끌어올리는 데 효과적인 도구로 작동했다. 같은 시기 이재명 후보는 남초 커뮤니티 ‘에펨코리아’에 직접 가입해 인사글을 올렸다. 커뮤니티 구성원과의 ‘소통’을 강조했지만, 실상은 그 정서에 동조하려는 태도였다. 최근 이준석 후보가 대선 출마를 선언하며 여성가족부 폐지를 1호 공약으로 들고 나왔다. 그가 과거 남초 커뮤니티에서 '이대남의 대변자'처럼 소비됐던 전략을 또다시 사용하는 셈이다.


그동안 많은 정치인들이 남초 커뮤니티의 언어와 감정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을 표를 얻기 위한 전략으로 사용해왔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갈등과 대립이 문제 해결의 자양분으로 추앙받으며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를 차별해도 된다는 식의 무책임한 구조가 재생산되었다. 정치는 더 이상 시민이 겪는 진짜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 대신 “너 대신 우리가 분노해 주겠다”고 말하며 특정 커뮤니티의 감정을 조직하고 유통한다. 결국 남는 것은 혐오와 배제다. 혐오가 정책이 되고, 감정이 권력이 되는 순간, 정치의 진짜 역할은 멈춘다.



함께 살아가는 감각을 되찾기 위해


우리 모두는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고 싶어한다. 긴밀하고 내밀한 관계를 통해 돌봄과 위안을 얻고자 한다. 연애 못하는 이들의 박탈감은 누가 더 많이 가졌는지를 따지기보다, 어떻게 함께 살아갈 수 있을지를 물을 때 비로소 해소된다. 여성을 억압하고 타인의 자유를 빼앗아야 공정하다고 느끼는 현재의 구조 속에서, 감정을 배제하지 않되 그것이 폭력으로 번지지 않도록 성찰하고 돕는 대안이 시급하다.


지금 소년들에게 필요한 것은 감정을 배울 언어, 안전하게 상처받을 수 있는 관계, 실패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공동체다. 지금의 소년들은 남성으로서의 자격을 증명해야만 인정받을 수 있는 세계에 내던져져 있다. 그러나 끊임없이 실패하는 증명에 변명을 토로하며 타인을 끌어내리는 방식으로는 끝내 누구도 행복할 수 없다.


우리가 소년들에게 돌려줘야 할 건 타인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관계의 감각이다. 비교나 증명이 아닌, 신뢰와 이해를 통해 연결될 수 있다는 가능성 말이다. 그리고 그 감각을 되찾는 일은 단지 소년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 우리가 어떤 사회를 만들고 싶은지에 대한 모두의 질문과 모두의 대답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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