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5월 17일, 강남역 인근의 한 건물 화장실에서 여성이 남성의 칼에 찔려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로부터 9년이 지난 지금까지 매년 같은 날 강남역 10번 출구 앞 광장에서는 사망한 여성을 추모하고 여성폭력에 반대하는 집회가 열린다.
처음엔 의무감에 참여했다. 그저 페미니즘 이름을 달고 있는 단체의 활동가니까. 남성으로서 여성에 대한 혐오와 폭력이 얼마나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지 알고 있으니까. 그러나 매년 참여하면서 점점 마음에 다른 감정이 쌓여갔다.
부채감이란 어느 대상에게 빚을 지고 있는 느낌이다. 매년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추모집회를 준비하고 참여하며 드는 감정이다. 여성에 대한 폭력이 지배적인 사회 분위기는 2016년부터 지금까지 변함없다. 3일마다 한 명의 여성이 친밀한 관계의 남성에게 살해당한다. 그동안 남성 페미니스트로서 무엇을 해왔고 반대로 무엇을 못해왔는지 생각한다.
속죄 페미니즘이란 말이 있다. 남성들은 페미니즘을 처음 접하며 자신이 얼마나 여성혐오적인 삶을 살아왔는지 필연적으로 자각하게 된다. 이 과정은 반드시 고통을 수반한다. 과거의 발언과 행동을 모두 곱씹으며 주변 여성들에게 한없이 미안해지고 용서를 빌고 싶어진다. 누군가에게 가해자였고, 지금도 가해자이고, 앞으로 어쩌면 가해자일 수 있는 남성으로서의 삶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저 속죄하고 사는 수밖에.
하지만 속죄만 하면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무릎 꿇고 양손 들고 '내가 나쁜 놈이요'라며 스스로 벌 받는다고 해서 뿌리 깊은 여성혐오가 뽑히지 않는다. 그래서 속죄하는 자신을 딛고 일어나 여성과 함께 행동해야 한다. 우리 사회는 단단히 잘못되었고 이제부터라도 바뀌어야 한다고 말해야 한다.
나에게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추모집회가 그렇다. 한없이 미안하고 빚진 느낌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론 이대로 가만히 있는 것만으론 변화가 스스로 일어날리는 없기 때문에. 그래서 우중충 비바람이 부는 오늘도 기꺼이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 깃발을 들고 광장에 섰다. 조금씩 더해가는 부채감을 견뎌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