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삶의 순간을 절실히 모아야 했던 마음

살고 싶어지는, 살아있던 순간들

by Ax

현대인이라면 누구든지 내가 거주하고 있는 곳 외에 도피처이자 안식처 같은 곳이 있다. 그곳이 집일 수도 있고, 여행지일 수도 있고, 친구 혹은 애인과의 만남일 수도. 어떤 것이든 나를 일으켜 세워주는 무언가를 고된 현대인으로서의 삶 속에서 기억해내는 것은 그래서 이 살고 싶지 않은 삶을 덜 꾸역꾸역 살아내고자 하는 욕망의 발로이다. 좀 더 극단적으로 생각해보면 우리는 죽음 속에서 삶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죽고 싶었던 순간에 문득 내가 정말 살아있었구나 싶었던 순간을 기억해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기억도, 아무런 힘듦도 없던 시기에 나를 꺾어버렸던 말은 그래서 죽음에 대한 것이었다.


"학교엔 수위 아저씨만 아는 죽음이 너무나도 많다."


여느 교수님과 다르게 죽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몸이 아프고 정신병에 걸린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던 한 선생님이 알려준 사실이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나와 어떤 방식으로든 동일한 시공간을 점유하는 사람들의 죽음이 나의 죽음으로 다가온 것은. 저 말을 듣기 전 과거의 시간은 도통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기억이라는 수단이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얼마나 기만적이고 이기적인가 깨닫게 된 덕분이지 않을까 돌이켜 생각해본다. 수없이 많았던 죽음과 그 죽음까지 이어진 일련의 과정들이 나를 얼마나 괴롭게 했나. 괴로워하며 살고 있는 것조차도 부끄럽고 원망스러운 나날들이었다.


갖고 태어난 것들과 누려온 것들이 많아 '다행히' 나는 죽지 않았다. 스스로도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올 힘을 갖고 있었을뿐더러 그 구렁텅이에서 나와 옷매무새를 다듬어주고, 손을 깨끗하게 닦아준 사람들과 순간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학교에서 수위 아저씨만 보아온 죽음들은 부채의식처럼 나를 따라다니며 부끄럽게 했다. 그 부끄러움과 기만적인 죄의식 덕분에 삶 가운데 죽음을 떠올리는 것은 온전히 나의 몫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해결하는 편이 옳다는 생각은 그렇게 오래 나이를 먹었다.


그래서 쓰는 것이다. 살고 싶어졌던 순간, 혹은 내가 살아있구나에 대한 감각이 느껴졌던 순간들을 쓰다 보면 학과 친구들이 모르는 죽음을 겪었던 아이들은 각자의 죽음 가운데 삶을 한 번쯤 더 떠올릴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이미 죽은 아이들에게 그 죽음 가운데 삶을 덜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꿰맬 수 있는 방법을 조용히 건네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렇다고 너희를 생각하면 눈물이 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대신 목울대가 아플 정도로 그 울음을 참다 보면 나는 내가 어느 구멍으로 숨을 쉬고 있는지 알 것만 같다. 혹여나 반대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여 이 말을 건네는 것이다.


기억할게라는 말 대신 더 필요했을 말과 글을 전해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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