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이란 재능을 시기하며

by Ax


책을 읽을 때 가장 마음 아픈 순간은 읽기 위해 표지가 접힐 때다.


서점에서 어떤 책을 살까 둘러보는 시간이 즐거우면서도 조마조마한 것은 그 때문이다. 혹여나 손가락에 힘이 더 들어가 새책의 표지가 접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어서. 다른 누군가가 접어야 하는 표지였을 텐데 내가 접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에.



물론 그런 책들도 있다.


첫 표지가 접히는 것도 모자라 너무 많이 되새김질해서 어떤 부분만 휘어진 책들. 빠르게 페이지를 훑다 보면 걸리는 페이지가 간혹 나온다. 이렇게 내가 곱씹어 읽은 부분들이 감각으로 기록되기도 한다. 이 감각이 모여 활자나 언사로 표현이 되기까지는 정말 많은 시간이 걸린다. 아마도 우리가 우울한 이유는 이 시간을 오롯이 혼자 견뎌내야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언제 시를 읽나.


떠올려 보면 가슴이 답답할 때였다. 우울함과 부담감이 동시에 몰려들 때 방어기제처럼 나는 시집을 집어 든다. 자의 반 타의 반 활자와 있는 힘껏 거리를 두고 살고 있으나 스스로 나를 깎아 먹는 순간들이 찾아오면 어쩔 수 없이 누군가 밖으로 쏟아낸 어구들을 찾는다.



오늘은 이광호의 “우리는 영원을 만들지”를 읽는다.


시를 쓰는 사람, 예술을 하는 사람이 시와 예술에 대해 말할 땐 한껏 귀를 기울이게 된다. 다음 생에 어떤 삶을 살고 싶냐는 질문에 나는 주저 없이 우리 집 강아지 혹은 예술가로 태어날 것이라 말했기 때문이다. 원래 동경은 무지에서 시작하고, 그 무지는 우리를 시기와 질투로 이끈다. 그래서 오늘 시기와 질투 끝에 기억해낸 시의 제목은 '시'였다.


내 안의 두려움과 싸울 때

시를 읽었다.

함께 싸울 아군을 모으는 일이었다.

-시, 이광호



그래, 나는 아군을 모으는 마음이었다.


혼자 괴로울 때면 버티기가 힘들었다.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것도 괴로움의 연속이었고, 그저 하릴없이 괴로움을 대결할 글자들을 찾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마음껏 괴로워하는 것조차 나에게는 너무 어려웠다.



힘들어, 괴로워 라는 말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내 마음은 별것 아닌 게 되어버리기 때문이었다. 그럼 가짜로 괜찮아지는 것을 강요받는 느낌이었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은 나에게 그렇게 들렸다.


...
혼자 북 치고 장구까지 쳐버린 탓에
물어본 이 칠 것 없었는지
자신의 배를 치며 배고프다고
밥 사 줄 테니 먹고 가라고

진짜 팔려버린 슬픔
이 값이 아닌데
팔고 싶지 않았던, 열심히 팔아버린
잘 못 팔려버린 슬픔

...
나는 잘못 팔아 버린 슬픔이 얼마나 부끄러워
차라리 서러웠으면
차라리 배라도 덜 불렀으면 했다.

- 슬픔의 값, 이광호





그래도 시를 읽다 보면 괜찮아지지는 않아도 내면 가장 깊숙한 곳의 못난 마음이 온전히 내뱉어지는 것만 같았다.


미워하고 질책하는 마음들이 가시로 나를 안팎에서 찔러댈 때면 그런 마음을 내뱉는 게 괜찮아지는 것보다 중요했다. 울퉁불퉁 조악한 모양의 마음들을 내뱉으면 그 못난 모양 그대로 마주할 수 있었고, 그러다 보면 이유는 모르겠으나 위로가 되었다. 반대로 내뱉지 않으면 가시는 마음 안에서 계속 굴러다녀 상처가 아물 생각을 않았다.




다시금 시집을 들게 한 가시는 열정이라는 재능의 부재였다.


재능이란 건 필시 타고나는 능력이다. 더 구체적으로 재능은 후천적으로 노력해서 키워내는 무언가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자신의 원천이자 뿌리로 삼고 있는 가장 중요한 줏대일 것이다. 그렇게 떠올린 내 재능은 재능이라고 말할 수 없을 법한 '애매함'이었다. 애매함이 재능인 사람. 애매함이 재능이라는 걸 조금 더 좋게 포장해본다면, 뭐든 중간은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딜 가든 잘 적응하고, 잘 배운다. 뭘 해도 결과가 나쁘지 않고 성실함을 무기로 열심히 해내서 대개의 경우 인정받곤 한다. 배부른 소리가 맞지만, 원래 인간은 자기 자신이 가진 결핍이 가장 크게 다가오는 법이다. 나는 그래서 내가 없는 재능을 시기했고, 이게 요즘의 가시가 되었다.



애매함 말고, 열정이라는 재능을 갖고 싶다.


열정이란 말은 너무 쉽게 쓰인다. 그만큼 열정이란 무엇일까 묻고 답하는 것은 굉장히 어렵다. 나는 재능으로서의 열정은 어떤 행위를 추동하는 이유가 명확하게 말할 수 있을 때가 아닌가 생각했다. 잘해서, 혹은 하다 보니 괜찮아서. 이런 것들 말고. 가슴이 뛰는 일을 꾸준히 하면 열정을 재능으로 가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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