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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리 May 11. 2022

취향의 발견

내 돈 주고 꽃을 사는 자의 변명

업종을 가늠할 수 없는 이름을 간판에 새기고, 꽃 대신 감성으로 매장을 채운 요즘 가게들 사이에서 '○○ 꽃 직매장'이라는 가게 이름은 주인아저씨의 외모만큼이나 투박하고 정직하다.

가게 안은 물론이고 가게 밖까지 빼곡하게 진열되어 있는 꽃송이와 꽃나무들은 갈 때마다 그 종류가 조금씩 바뀌어서 꽃가게인데도, 제철 식재료가 풍성한 재래시장 느낌이 난다. 그 느낌에는 아무렇게나 휘갈겨 쓴 가격표와 포장을 위해 가게 한편에 쌓여있는 신문지도 분명 한몫을 할 것이다.

4월 말, 보름 만에 찾은 가게 입구에는 프리지어가 떠나고 새로운 녀석이 자리를 차고앉아있다. 배추흰나비의 날개를 닮은 꽃잎이 진주처럼 은은한 빛을 내며 바람에 살랑이는 걸 보고 있자니 내 마음도 가벼이 살랑이는 것만 같다. 얇고 여리한 봄옷을 걸치고 싱그러운 봄바람을 맞는다면 이런 기분이 아닐지 생각해본다. 옷에 취향이 있듯 꽃에도 취향이 있어서 예쁜 것들 속에서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다. 지난번 라넌 큐러스가 그랬고 이번 버터플라이가 그렇다.

두 꽃 사이의 교집합을 찾기란 어렵지만 내 옷장 속 옷들처럼 둘은 서로 다르면서도 한 결이다. 굳이 말하자면 그냥 내 취향이다.

손에 꼽힐 정도지만, 과거에 호의적인 관계에 있던 상대로부터 꽃다발이나 꽃송이 같은 것을 받아본 일이 있다. 그때마다 감동과 감사로 도리를 다했지만 마음을 죄어오던 묘한 부담감에 온전히 즐겁지 못했다. 살아있는 것을 부러 죽여본 일은 없으나 알뜰살뜰히 거둘 재주도 없는 사람으로서 밑동이 잘린 채 간신히 숨을 붙이고 있는 생명을 받아 쥐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했다. 끊어진 다리를 쉴 새 없이 꾸물 거리는 산 낙지 접시를 받아 든 느낌이랄까...
꽃을 받아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면, 며칠 못 가 처참하게 죽어갈 생명들을 이제 어찌해야 할 것인지 심각한 고민에 빠지곤 했다.

그러나 집에 돌아와 꽃병에 꽃을 꽂은 다음부터는 부담도 걱정도 없이 무심해졌다. 꽃은 십 년을 같은 자리에 있던 거실 액자처럼 아무 일 없이 지내다 차차 고꾸라져 갔다. 나는 그제야 염을 치르듯 꽃송이부터 줄기 밑단까지 전체를 신문지로 꽁꽁 싸맨 뒤 종량제 봉투에 넣었다. 그게 다였다. 내가 꽃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곤 죽음이 낯설지 않은 장의사처럼 꽃을 보내는 일뿐이었다.

생각해보면 사실 그때의 나는 떨어질 때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한 꽃잎처럼, 다른 이들의 눈길을 끄는데 여념이 없었다. 가만히 놔두고 죽기를 기다리는 꽃 보다, 액세서리나 화장품, 옷 같이 나의 외모를 치장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들이 더 좋았다. 안타깝게도 나의 20대 초중반은 내 겉모습과 그것을 바라보던 시선 외에는 아무것도 돌아보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시간과 에너지가 넘쳐났지만 쓰는 방법을 몰랐던 시절...

그 아련한 시절을 지나 이제는 마흔의 나이가 된 내가, 이렇게  꽃에 대한 취향을 논하고 있다. 꽃을 사고, 꽃을 보며, 꽃으로 하여금 새로운 기분을 입고 그 과정을 소소한 행복으로 느끼고 있다. 예전에 없었던 삶의 여유가 생긴 것이다. 건사해야 할 아이가 둘이나 딸린 싱글맘이 되고 나서야 꽃을 즐길 여유가 생겼다는 것이 아이러니 같지만 챙겨야 할 것들이 많아지면서 시야가 넓어지고, 넓어진 시야만큼 많이 보고 느끼게 된 것이다.

긴 시간을 돌아 많은 것을 잃고서야 얻게 된 여유를 계속 간직하길 바라며, 만원 짜리 한 장도 되지 않는 저렴한 비용으로 취향의 발견을 가능하게 해 주신 '○○ 꽃 직매장' 사장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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