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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리 Jan 22. 2023

내게도 남편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1)

혼자라 힘든 날들

아이들이 떠난 아침, 드립백 커피 한 봉을 뜯어 머그컵에 걸쳐 놓고 커피 포트 전원 버튼을 눌렀다. 오래지 않아 물 끓어오르는 소리가 들리고 주전자 코로 하얀 김이 새어 나왔다. 뜨거운 물을 조금씩 천천히 드립백 위로 흘려보냈다. 부드러운 커피 향기가 차가운 공기를 감싸 금세 잔이 채워졌다.


커피 잔을 들고 딸기 쿠션에 기대앉았다. 이에게 어린이날 선물로 사줬던 똥이 몸집 보다 더 커다란 쿠션이다. 푹신한 딸기에 몸을 맡긴 채 커피 한 모금을 입에 적셨다.


"하아-!"


꽉 막혔던 가슴이 뚫리는 듯 도 모르게 숨이 터져 나왔다.  커피를 내려 마실 여유도 휴대폰을 제대로 들여다볼 시간도 없이 새해 벽두부터 내게는 참 많은 일이 있었다. 회사에서 일어난 예기치 못한 사고는 접어두고라도 집을 샀고, 차를 바꿨다. 집을 사는 것이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사야겠다는 결심을 내리기 전까지 후보지를 선택하고 후보지별 입지를 분석하고, 실제로 매물을 보러 다니는 등 머리 쓰고 몸 쓸 일들이 더 많았다. 나는 이 과정들을 이미 해가 바뀌기 전에 충분히 거친 다음이라 움직임이 바빠진 건 부동산 중개인과 나의 돈들이었다.


집을 사는 데는 집값을 제외하고도 많은 돈이 든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집을 살 때 매매가만 중점적으로 들여다본다. 그도 그럴 것이 새 집으로 이사를 간다는 기쁨에, 새집이 주는 희망의 기운에 휩싸여 매매에 따르는 부대비용이 얼마가 되든 크게 개의치 않는 것이다. 중개 수수료가 나가고, 취등록세가 나가고, 공채를 구입하고, 등기이전을 대행할 법무사 수수료를 지불하면서도(아파트의 경우 관리비 예치금까지 전 주인에게 내어주어야 한다. 물론 내가 매도할 때 매수인으로부터 돌려받는 돈이긴 하지만 적은 액수는 아니다.) 돈이 나가고 있다는 느낌을 크게 받지 않는다. 몇 억이나 되는 큰돈을 융통하고 송금하는 과정을 거치다 보니 돈의 단위에 대한 감각이 다소 무뎌진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내 경우는 매수만 했지 이사를 하지 않았고, 기존의 임대차 계약을 승계하는 조건으로 매매가 이루어졌기에 집을 사는데 들인 돈이 오천만 원 밖에 되지 않았다. 주거환경이 달라졌다는 기쁨도, 새 집의 기운도 느낄 수 없었고 들인 돈이 적다 보니 돈의 단위에 대한 감각도 그대로였다. 오히려 친정집의 얼룩진 벽지와 닳아 빠진 문턱을 보고 있자니 의 물건을 잃어버려 돈만 실컷 물어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이 비유가 좀 이상할 수도 있지만 내 상황에 찰떡같이 들어맞다. 매물 보러 그 집에 발을 잠시 들인 것 말고는 집 구경도 못 해봤으니 말이다.) 집을 보러 다닐 당시만 해도 원래 성공한 투자가는 공포에 사고 탐욕에 파는 것이라며 지금이야말로 급매로 나온 매물을 잡을 수 있는 적기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계약을 하고 나니 당장 살지도 않을 집을 사서 안 내도 될 중개수수료와 취등록세를 내게 된 것 같아 한 짓을 했다 싶었다. 하지만 집을 샀으니 중개수수료도 취등록세도 내야만 하는 돈인 걸 어쩌나...  굳이 지출을 줄여보자면 줄일 수 있는 부분이 부동산 등기 이전을 위한 법무사 대행 수수료였기에 셀프 등기를 하기로 했다. 요즘은 정말이지 인터넷에 셀프등기 선배님들도 많이 계시고 인터넷 등기소에 등기신청 폼도 마련돼 있어서 셀프 등기를 준비하는 것 자체는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중개사무소에서 구청으로 구청에서 다시 법원으로 법원에서 은행으로 다시 또 법원으로 쫓아다니다 보니 진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


오전 10시에 집을 나와 최종적으로 법원 등기과에 등기서류를 제출하고 나오기까지 여섯 시간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녔는데 집에 가려고 차에 오르자 계기판에 노란색 경고등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엔진오일 교체 시기 알림이다. 음에 해야지 하고 살짝 외면해도 될 일이지만 기왕 낸 휴가 알차게 써볼 요량으로 차량 공식 서비스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사전에 예약을 못 했는데요. 혹시 바로 가 엔진오일 교환 가능할까요?"

"네. 고객확인 먼저 해드리겠습니다. 고객님 0000번 00000 차량 차주분으로 확인되시는데 맞으십니까?"

"네. 맞아요. 오늘 교환 가능할까요?"

"네. 4시 30분에 교환 가능하신데 무상교환 서비스 쿠폰을 모두 소진하셔서 오늘 교환하시면 비용이 발생할 예정입니다."


19년 11월에 차를 산 이래 엔진오일 교환에 한 번도 비용을 지불한 적이 없다가 이제부터 돈을 내야 한다니, 수입차의 유지비 지옥이 이제부터 시작인가 하는 생각에 약간의 두려움이 들었다. 하지만 어디 부품을 교체하는 것도 아니고 뭐 기껏해야 엔진오일 교환인데 얼마나 들겠어? 하는 생각으로 호기롭게 정비센터로 차를 몰았다. 그리고 당당하게 정비센터 사무실에 들러 접수를 하고 엔진오일 교환에 걸리는 비용과 시간을 물어봤다. 엔진오일 교환하는 틈에 근처 식당에서 허기라도 채울 심사였다.

 

"금액은 397,000원입니다."

"네?"

"네. 3회분 선결제를 하시면 보다 할인된 금액으로..."

"아니요. 저 엔진오일 교환 전문점에 가서 따로 하겠습니다. 차 뺄게요."


허기고 정신이고 뭐고 다 달아나는 것 같았다. 나는 귀신이라도 본 듯 황급히 차를 몰아 공식 정비 센터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주차 가능한 갓길에 차를 세우고 휴대폰으로 엔진오일 교환 전문점을 검색했다. 내 위치 기준으로 근거리에 있는 곳부터 여러  업체의 상호와 연락처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수입차에 대중성 있는 차종이 아니다 보니 에어컨 필터나 일필터가 구비돼 있지 않아 제품을 들이는데 며칠이 소요된다고 했다. 열 군데 이상의 업체에 전화를 돌린 끝에 내 차종의 오일필터가 구비 돼 있 지금 즉시 교환작업이 가능한 곳을 찾았다. 공식 수리센터에서 제시한 금액의 절반도 안 되는 가격으로 엔진 오일을 교환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회사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주임님~! 휴가신데 죄송해요. 충북에서 전화가 왔는데 자격증 원부를 급히 찾아줘야 하는 건인가 봐요. 내일 아침 10시까지 자료를 찾아야 한다는데 주임님께 미리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네.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내일 일찍 출근해서 찾아드린다고 전해주시겠어요? 내일 뵐게요~!"


전화를 끊고 나니 눈물이 났다. 집안일 허들을 숨 가쁘게 넘어서고 나니 회사 업무가 지뢰밭처럼 펼쳐져 있는 것 같았다.(원부를 찾아주는 것 말고도 따로 수습해야할 일이 있었고 새롭게 부여된 프로젝트도 있었다. )


이혼 후 처음으로 내게도 중대한 결정에 함께 해 줄, 이런저런 서류는 내 대신 발급해 줄 수 있는, 지친 몸을 기댈 수 있는 지혜롭고 자상한 남편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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