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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리 May 04. 2023

상향적 사후가정사고

휴직일기_2023.04.28.

휴직 개시일로부터 두 달이 다 돼 가는 지금, 나의 일과를 살펴보면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말이 딱 들어맞다.

새벽 6시에 일어나 아이들 등교 준비를 도운 다음, 한두 시간 살림과 소일을 하고 9시경 동네 복지센터 2층 북카페로 가서 3~4시간 정도 공부를 하고 오후 1시 30분이 조금 넘으면 3층 체력단련실로 올라가 3시까지 운동을 한다. 샤워를 마치고 짐을 챙겨서 3시 30분까지 똥이 학교로 가서는 똥이를 태우고 집으로 간다. 집에서 간단한 식사를 하고 똥이를 피아노 학원에 데려다 준 뒤 빵이를 맞이해서 간식을 먹이고 빵이를 미술학원에 데려다준다. 그 길로 똥이 학원 앞으로 가서 똥이를 데리고 집으로 온다. 그리고 다시 빵이를 데리러 갔다가 돌아와서 저녁을 차리고, 먹고, 설거지까지 마치고 나면 똥이 공부를 봐주는 일이 남는다. 사실 똥이 공부는 봐주기는 거르는 날이 더 많아서 고정적 일과라고 하기엔 조금 부끄럽지만 저녁식사 이후의 시간만큼은 놀든 공부를 하든 아이들과 함께 하고 있으니 나의 정신과 육체가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는 시간이다. 


남들(남편 있는 여자들)은 육아휴직 기간 동안 육아 외에 취미 활동이나 여행, 쇼핑 같은 것들을 하며 재충전의 기회를 갖던데 나란 여자에게 재충전 따위는 다. 사실 공부만 시작하지 않았어도 이만큼 쫓기듯 살지 않아도 될 텐데 2주 전부터 독학사 공부를 시작한 것이 화근이다. 시험은 한 달 도 채 남지 않았고 공부할 시간은 부족하고, 모바일 헬스케어를 시작했으니 운동도 안 할 수 없고, 명색이 육아휴직자인데 아이들과의 시간도 소홀히 할 수 없고, 이것저것 다 놓치지 않으려니 바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 할 것이 많다 보니 공부할 때 타이머를 맞춰놓고 학습 시간을 관리하며 정해진 학습 분량을 어떻게든 채우려고 노력한다. 학습 시간과 학습의 질이 반드시 정적 상관을 보이는 게 아닐지라도 잠깐의 쉬는 시간을 제외하고 한 자리에 앉아 서너 시간 동안 독학사 교재를 펼쳐 들고 있는 나를 보면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문제는 나란 사람의 생각이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임용고사를 준비하던 20대 때 이런 집중력과 끈기를 가졌더라면 일등 신붓감이 돼서 그런 씨×× 같은  남편을 만나지 않았을 텐데 하는 후회와 한탄을 기어이 하고 만다.

그때 이렇게 했더라면... 이렇게 했어야 하는데...


흔히 지나간 일에 대한 후회라고 이야기하는 이 사고를 심리학에서는 상향적 사후가정사고라는 용어로 설명하고 있다. 실제 일어난 일보다 잘 되었을 상황에 이미 벌어진 상황을 비교함으로써 후회, 실망과 같은 부정적 감정을 동반하는 것으로 '조금만 더 힘을 냈다면 금메달을 딸 수 있었을 텐데....' 라며 후회하는 은메달리스트의 심리가 상향적 사후가정사고의 대표적 사례이다.


지금 공부 중인 책의 내용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향적 사후가정사고를 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인간이 자존심을 지키고 자신의 능력을 포장하기 위해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특성과 확정할 수 없는 상황을 교묘하게 이용한 진화의 산물이 상향적 사후가정사고가 아닐까?


여기서 나는 스스로에게 떳떳해지기 위해 상향적 사후가정사고가 일어난 지점으로 사고를 되돌려 본다.

임용고사를 준비하던 20대에 이렇게 열심히 했다면 나는 교사라는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을 갖고 더 좋은 남자를 남편감으로 맞이할 수 있지 않았을까?

20대의 나는 젊음의 기운이 온몸에 넘쳐흘렀고 연애에 미쳐 있었으며 삶을 계획하는 능력이 부족했다. 다시 말해 그 시절의 나는 절대 3시간을 내리 앉아 있을 수 없는 존재였다. 따라서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서 나는 임용고사를 합격할 만큼 성실하게 공부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을 갖는 것과 좋은 남편을 얻는 것은 상관관계에 있지 않다. 교사가 됐다고 해서 좋은 남편을 만났을 것이라고 확언할 수 없다.

좋다는 기준은 상대적인 것이며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결혼을 결심할 당시, 전남편도 내게는 그럭저럭 좋은 남자였다.


후회와 아쉬움을 걷어내자 나란 사람의 모자란 능력치가 여실히 드러난다. 구름이 걷히자 민둥산이 모습을 드러낸 꼴이랄까? 그래도 뭐 이게 나라면 받아들여야 하는 걸....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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