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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리 May 07. 2023

자기효능감

휴직일기_2023.05.03.

"○○님, 병원입니다. 검진 결과가 나왔는데 콜레스테롤 수치가 좀 있으시네요. 진료를 보셔야 할 것 같아요. 언제가 괜찮으세요?"


올해 들어 유난히 머리가 아프고 뒷목이 당긴 적이 많았다. 처음엔 과로와 업무스트레스, 인간관계에 대한 회의 이런 것들이 겹쳐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과도한 업무와 능숙하지 못한 업무능력, 미친 책임감이 삼박자를 고루 맞추다 보니 칼출근, 칼퇴근은 저 세상 이야기가 되어버렸고 새벽 6시도 모자라 5시, 4시, 3시로 출근 시간을 점점 당겨서 일을 해야 했다. 고시나 공고가 된 것도 아니고 자체적으로 수립한 계획에 의해 정해진 기한이라 얼버무리고 미루면 미룰 수도 있는 것들이었지만 내게 그 일이 주어진 이상, 동료 혹은 상사에게 업무 기한을 지키지 못하는 신용 없는 사람 혹은 무능력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기 싫었다. 그래서 아등바등 거리며 죽기 살기로 버텼다. 만 석 달을....


그런데 터질 것은 결국 터지고 마는 것인지 과중한 업무가 아니라 동료와 상사의 말 한마디, 무례한 행동 하나가 나를 참을 수 없게 만들었다. 다 벗어던지고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한부모였다. 회사를 그만 두면 늘 버릇처럼 말하는 작고 귀여운 이 월급도 당장 끝이었다. 새로이 직장을 구한다 해도 공공기관 사무행정 근무경력이 호봉으로 인정될 가능성은 희박했다. 사회 초년생처럼 새로운 직장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1호봉의 신입직원으로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다. 거기에 단순히 생계를 위해 선택한 직장이 나의 적성에 얼마나 잘 들어맞을 것이며 나는 얼마나 만족할 수 있을 것인가? 당장 벗어나지 못하면 나 한 명 죽을 것 같은 걸로 끝나겠지만 그대로 때려치우고 나면 애들 둘까지 해서 사람 셋이 정말 다 죽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일단 도망치기로 했다.


그렇게 시작한 육아휴직, 내가 처음으로 한 일은 건강검진이었다. 원인 모를 부정출혈과, 두통, 피로 등의 원인을 찾고 싶었다. 나쁜 세포가 있으면 쫓아내고, 고장 난 곳이 있으면 고치고, 검진 결과 아무 이상이 없다면 나를 위해 보약이라도 한 재 지어먹을 요량이었다. 검진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자궁암, 유방암, 위암 등 알고 있는 암이란 암의 이름은 모조리 떠올려보며 내 몸의 무사 안녕을 기원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혈액 속 콜레스테롤이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나란 사람은 키 166cm에 몸무게 52kg, 흡연은 물론, 술이라고는 입에 대지도 않는 40대 초반 여자로 특별히 육식을 선호하지도 탄수화물 중독이 있지도 않은, 꾸준한 헌혈 참여로 헌혈 유공표창까지 받은 사람이니까 말이다.


웃으며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란아. 나 검진 결과가 나왔는데, 콜레스테롤 수치가 좀 높단다."

"어? 그럼 고지혈증? 말도 안 된다. 딴 데는 괜찮다나?"

"응. 딴 데는 괜찮단다."


그렇게 짧게 경상도 여자들의 찐 대화를 마치고 건강검진 결과지를 찍어 친구에게 톡으로 보냈다. 이번에는 친구가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야! 난 니 콜레스테롤 수치보다 그 밑에 우울증 수치가 더 걱정된다!!!! 니 진짜 괜찮은 거 맞나?"

"아..... 아 괜찮다. 막 행복하고 즐겁진 않아도 살만한데?"

말 그대로였다. 행복하고 즐거운 일이 없지만 그냥저냥 살 수 있는 상태. 그즈음의 나는 그랬다. 무례한 행동질 안 좋은 소문 앞에 제대로 한 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직장에서 도망쳐 나온 40대 초반의 여자. 모아 놓은 재산도 많지 않고 사회적 지위도 이루지 못한 중년.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무엇을 잘할 수 있을지도 모른 채 방황하는 존재. 


전화를 끊고 검진 결과지를 다시 들여다봤다. 중간 정도 우울증이 의심되는 상태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몸뿐 아니라 마음도 탈이 난 모양이었다. 우선 보건소에서 심혈관계질환자 및 비만 환자를 대상으로 실시하는 모바일 헬스케어를 발판 삼아 운동을 시작하기로 했다. 마음을 일으키는 것보다 몸을 일으키는 일이 조금 더 쉬울 것 같아서였다.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마음이 따른다는 말처럼 몸이 건강해지면 마음도 조금 밝아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운동을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난 지금, 크런치를 하는 횟수, 스쾃을 하는 자세, 플랭크를 지속하는 시간이 모여서 변화를 이끌어내고 있다. 팔과 다리에 힘이 생기고, 앉았다 일어나는 속도가 빨라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게도 목표를 이뤄갈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걸 깨닫고 있다.


할 수 있다는 의지, 우리가 흔히 자신감이라고 불러왔던 이 신념을 심리학에서는 자기효능감이라 정의하고 있다.

자기효능감이란
어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요구되는 활동을 조직하고 실행하기 위한
자신의 능력에 대한 신념을 말한다.


자기효능감은 우리가 인생의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스트레스 상황에 보다 잘 대처할 수 있도록 도움을 . 그래서 자기효능감이 높은 사람은 낮은 사람에 비해 더욱 열심히 일에 집중하고 일을 오래 지속할 수 있으며, 성취적인 부분에서도 남들보다 긍정적인 결과를 거둘 수 있다.


40이 넘은 나이에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직장에서 도망친 내게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것이 업무능력이나 인내심, 사회성이 아닌 자기효능감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이제 일 년도 채 남지 않은 기간, 운동을 계기로 자기효능감을 키우는데 애써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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