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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아라 Mar 09. 2017

삶과 삶 사이 - 거리 - 두는 연습

[일상기술연구소 S2] 차이를 뛰어넘는 대화의 기술_심화연구편

작년 12월이었습니다. 어딘가로 걸어가고 있던 제 걸음은 어느 폐지 줍는 할머니를 마주하는 순간 멈춰버렸습니다. 그녀는 그 해 봄에 돌아가신 백발의 저의 친할머니와 너무 닮았었거든요. 한동안 발을 떼지 못하고 그녀가 폐지를 줍고 리어카를 끌고 제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계속 바라보았습니다. 너무 닮아 놀랍기도, 그녀의 노동이 안쓰럽기도, 할머니의 생전 모습이 생각나기도, 그냥 슬프기도 한 복잡한 기분을 느끼면서 말이죠.


이번 ‘차이를 뛰어넘는 대화의 기술’ 편을 들으면서 작년 12월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저의 친할머니와 외할머니가 자연스레 생각났는데요. 이번 방송의 게스트 최현숙 작가님이 추천해주신 책 [노년은 아름다워]를 읽으면서 두 할머니의 살아온 인생을 생각해보기도 하고요. 저는 왜 두 할머니를 생각했을까요? 그리고 왜 할아버지는 떠오르지 않았을까요? 불쑥 궁금했습니다. 


저의 친할머니와 외할머니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인생을 걸었습니다.  


1920년대생인 외할머니는 그때 그 시절 이야기에 나올 법한 인생을 사셨습니다. 아주 어릴 때 외할아버지를 만나 별다른 연애기간도 없이 결혼, (무려) 10남매를 낳아 키우셨습니다. 거기다 크고 작은 농사일에, 대가족 살림까지… 그야말로 50년~90년대 한국 농경 생활의 흥망 카테고리를 다 거치셨습니다. 2004년 9월, 76세의 나이로 돌아가셨을 때 대학교 2학년이었던 저는, 장례식도 외할머니의 죽음도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슬퍼하는 엄마 옆에서 멍하니 있었더랬죠.


외가댁을 자주 가지 못했기에 제가 기억하는 외할머니의 모습은 정말 손에 꼽을 정도로 적습니다. 구부정한 허리로 주방에서 식사를 준비하시거나 보자기 같은 걸로 머리를 감싸고 밭일 하시던 모습, 그리고 제가 가장 선명하게 기억하는 장면이 있는데요. 자기 전 방 앞 툇마루에 안방마님 자세로 앉아 담배를 태우시며 하늘을 바라보던 외할머니의 옆모습입니다. 쪽진 머리에 오래된 비녀를 꼽고 담배를 태우시는데 그 연기가 파란 밤하늘로 뭉게뭉게 떠나가는 게 어찌나 멋있던지… 그때 스마트폰이 있었으면 사진을 찍어놨을 텐데 말이죠.


한편 1930년대생인 친할머니 역시 어릴 때 할아버지를 만나 결혼하시고 5남매를 낳아 키우시며 여러 도시를 돌며 장사를 하셨습니다. 정착하며 살았던 외할머니와 달리 친할머니는 이사가 잦은 편이셨어요. 육아, 살림에 장사까지- 혀를 내두를 정도의 노동을 매일 하셨죠. 자신이 다리가 아파 걷기 힘들어도 지팡이를 잡고 밖에 나가셨던 분이셨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할머니의 모습은 호탕하고 똑 부러지고, 한시도 손을 가만히 놔두지 않은 분이셨습니다. 꾀가 넘치는 분이었다고 해야 할까요, 시장에서 물건 값을 깎기 위해 상인과 밀당하는 기술이 고수셨습니다. 하지만 친할머니는 호탕한 자신의 모습을 기억하지 못한 채 말년을 보내시다 돌아가셨습니다. 치매를 앓다 가셨거든요. 똑 부러진 할머니가 그 자신의 모습을 잃어가실 때마다 옆에서 지켜보는 이들의 마음이 참 아렸습니다. 작년 봄, 80세의 나이로 친할머니가 돌아가실 때는 외할머니 때와 다르게 너무 실감이 나더군요. 저도 많이 슬퍼하며 할머니를 보내드렸습니다. 


친할머니가 그려준 익살스런 나의 모습 (2014)


이렇게 저의 두 할머니의 인생을 짧은 글로 정리를 해보니 결국, 자식을 위해 일만 한 ‘할머니’로 적어버린 것 같습니다. 아마도 제가 태어날 때부터 그들은 제게 할머니로 인식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나마 할머니들은 만날 때마다 이야기도 나누고 부모님께 전해 들은 이야기가 있어 이만큼이라도 적을 수 있었지, 할아버지의 인생은 흠… 적을 엄두도 나지 않습니다.


책 [노년은 아름다워]에서는 노년이라는 타임라인을 걸어가는 다양한 인생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시대 노년의 정체성에 대한 프롤로그를 시작으로, 요양보호사로 일하면서 노년의 생애 구술사를 쓰기까지의 여정을 말해주는 최현숙 님, 자신의 인생에서 주인공은 자신이라고 말할 수 있는 여자 최영선 님, 이민 사업가로 성공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졸혼을 하고 시골에서 집 짓고 글 쓰며 살아가는 김담 님, 거리의 여행가 이영욱 님, 원하는 것을 위해 집을 떠나는 여자로 살아온 윤석남 님, 송전탑 반대 투쟁을 벌이고 있는 밀양 할머니들, 일본의 시민활동가 군지 마유미 님, 방송인 다지마 요코 님의 이야기가 차곡차곡 실려있습니다. 저는 노년의 이야기를 이렇게 날 것으로 마주한 경험이 없어 진정 각각의 이야기에 푹 빠져 읽었는데요, 그중에서도 일본의 방송인 다지마 요코 님의 다양한 예술활동을 하며 멋있게 살아가는 이야기에 특히 집중하며 보았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저의 두 할머니를 떠올린 이유는 여기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노년까지 다다른 맥락이 전부 같지 않은데, 저는 두 여성을 고생한 할머니로만 바라보며 연민을 느끼거나 안타까워 한 건 아닐까요? 제가 적은 두 여성의 인생 이야기는 아마 그녀들의 인생에서 한 부분에 불과할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녀들의 꿈은 무엇이었는지, 어디서 나고 자랐으며, 학교 생활은 어땠는지, 어떤 친구들이 있는지,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취미생활은 있었는지, 처음 봤던 영화는 무엇인지, 이상형은 누구인지 저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이렇게 인생에서 많은 걸 결정짓는 중요한 질문의 답을 모른 체 그저 자식을 위해 인생을 희생하며 산 사람으로 단정 지어버릴 뻔했습니다.


저의 두 할머니 이야기를 제 안에서 다시 쓰고 싶습니다. 그냥 친할머니가 아닌 박종순 님으로, 그냥 외할머니가 아닌 신필랑 님의 인생 이야기로 말이죠. 그녀들이 어떻게 노년이 되어 저와 만나게 되었는지 또래 노인들, 친지 등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요. 아마 제가 할머니가 되어도 그녀들의 이야기를 전부 적을 수 없겠지만 분명한 건, 전 그녀들을 잊지 않고 알아갈 수 있을 거예요. 


‘차이를 뛰어넘는 대화의 기술’은 비단 나이가 많은 사람과 적은 사람 간에만 필요한 기술은 아니겠지요. 동시대를 사는 또래라도 이야기를 하다 보면 분명 차이는 존재하니까요. 같은 시대에 놓여있어도 인생을 만들어가는 개인의 타임라인은 전부 다른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각각의 타임라인 사이를 애써 좁히지 않는 것이 중요할 것 같아요. 그래서 최현숙 작가님이 알려준 ‘호기심만 남기고 감정은 버리기’의 기술은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는 데 큰 도구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여자를 여자로 보지 않고, 할머니를 할머니로 보지 않고 그저 사람으로 인지하는 연습을 언젠가부터 하고 있습니다. 이번 ‘차이를 뛰어넘는 대화의 기술’ 편에 출연하신 최현숙 작가님의 말씀을 들으며 이 연습을 계속해도 되겠구나 하는 근거 있는(!) 자신감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어쩔 수 없이) 차이를 뛰어넘지는 못할 것 같지만 ‘차이는 기본이다’라는 걸 전제로 깔고 대화를 하다 보면 그저 배제해버리는, 쉽고 불편한 방법에서는 조금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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