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팟캐스트 #일상기술연구소 #차이를_뛰어넘는_대화의_기술
#일상기술연구소 시즌 2의 스타트는 '차이를 뛰어넘는 대화의 기술'에 대한 연구로 끊었다. 2주에 걸쳐 [할배의 탄생]을 쓰신 최현숙 작가를 기술자로 모시고 이야기를 나눈 뒤, 추천해주신 책 [노년은 아름다워]로 3주차의 심화연구 편을 진행했다.
사람과 만나 대화를 나누는 일의 의미에서부터 시작해, 저성장시대와 노년의 삶을 바라보는 관점까지, 여러 지점에서 새롭게 생각을 환기해볼 수 있었던 3주였다.
나는 '일하는 상황'에서의 만남을 가장 편안하게 생각하는 편이다. 일 중심으로 생각하고 마는 성향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동시에 늘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는, 숫기 없는 성향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대화는 흔히 공통의 것을 포착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일을 위해 만난 자리에는 상대와 나의 공통 기반이 명료하게 드러나 있다. 이때의 대화는 결국 어느 지점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이미 알고 시작된다. 그런 자리가 어느 정도 주어진 스크립트가 있는 공연이라면, 순전히 사교적인 만남은 훨씬 더 즉흥극에 가깝고, 나는 이런 즉흥극이 대체로 어색하고 힘겹다.
방송에서도 언급했지만, 내게는 15년 넘게 함께 취미를 나눠온, 대개 나보다 나이가 많은 친구들이 있다. 그들은 라이프스타일, 사고방식, 성격, 취향 등 거의 모든 면에서 나와는 무척이나 다른 사람들인데, 어느 날인가 그들과 하릴없는 대화를 나누다가 '이들을 10년 후에도 계속 보며 지내겠구나, 함께 나이가 들어가겠구나'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제는 다들 사는 게 바빠져 여전만큼 자주 보지 못하지만, 우리에게는 언제나 대화를 시작할 수 있는 공통의 관심사가 있고, 그곳은 안전한 대화의 출발점이 되어준다. 거기서부터 출발해 대화는 이어지고, 우리는 서로의 차이를 숨기지도, 억지로 봉합하지 않으면서 이야기를 나눈다. 때로 타박하며, 때로 설득하며, 때로 그냥 웃어 넘기며. 이때쯤이면 즉흥극은 더이상 그저 '극'에 머물지 않는다.
내가 그 공통의 취미라는 맥락 없이 지금 그들을 처음 만났다면 과연 친구가 될 수 있었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어쩌면, 좋은 대화의 시작은 바로 이런, 가장 안전한 공통의 출발점을 찾아내는 것에 있을지 모르겠다. 금정연 작가(aka 금고문)가 이야기했듯이, 실은 '날씨' 이야기보다 중요한 것도 없다. 대화를 나누는 바로 지금, 당신과 내가 분명히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날씨보다 더 확실한 건 없을 테니까.
가장 공고한 대화의 상대는 그래서, 나와 차이가 가장 적은 사람이 아니라, 나와 공통 기반이 가장 깊은 사람이다.(이 둘은 전혀 같지 않다.) 그리고 그 공통 기반은 오로지 밀도 있는 시간을 통해서 깊어진다. 함께 몸을 부딪혀 취미를 나눠온 사람들, 함께 책을 읽으며 글을 나눠온 사람들, 함께 일 해온 사람들. 이들과 대화를 나눌 때, 우리 사이의 차이는 굳이 뛰어넘을 필요가 없는, 그냥 거기 있어도 괜찮은, 아니 있어서 근사한 배경이 되어준다.
"모든 인생은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 재미있는 것 같아요."
노년기를 살고 있는 여덟 명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쓰인 책 [노년은 아름다워]를 읽고 금정연 작가가 방송에서 했던 이야기다. 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누구나 이 정도의 정성을 들여 바라보면, 어떤 종류의 특별함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차이를 뛰어넘으려면, 그 차이를 뭉뚱그리는 대신, 거기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그것도 오롯이 각기 다르며 개별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을 먼저 알아차려야 한다. 그리고 그 차이가 바로, 각자가 지닌 특별함이다. 이렇게 생각이 이어진 것은 작년 언젠가 읽었던 책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요상한 버릇이 있었다. 길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적당히 집어 들고 언제까지나 그 돌을 지그시 바라보는 버릇이었다. 내 정신을 쏙 빼놓은 것은 바로 무수한 돌멩이 중 하나일 뿐이었던 그것이 '이 돌멩이'가 되는 신비로운 순간이었다.
난 한 번도 돌멩이에 감정이입을 한 적은 없었다. 이름을 지어 의인화하거나 자신의 고독을 투영하거나 돌멩이와 나누는 은밀한 대화를 상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근처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무수한 돌멩이 가운데 무작위로 하나를 골라 손바닥에 올려놓고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고 의식을 집중시켜 응시하고 있으면, 점점 별다른 특징도 없는 돌멩이의 형태, 색깔, 무늬, 표면의 모양, 흠집 등이 한껏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래서 다른 어떤 돌멩이와도 다른,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이 돌멩이'가 되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때 이 돌멩이가 세상의 어떤 돌멩이와도 다르다는 사실이 뚜렷해진다. 그 점에 도취해 있었다.
나아가 이 세상의 모든 돌멩이가 각각의 형태, 색깔, 무늬, 모양, 흠집을 가진 '이 돌멩이'라는 것. 그런 상상을 훨씬 뛰어넘은 '방대함'을 필사적으로 상상하고자 했다. 감정이입도 없고 의인화도 없는 곳에 존재하는, 그리고 '모든 것'이 '바로 이것'이라는 그 단순한 엉뚱함. 그 속에서 개별이라는 것이 지닌 무의미함.
이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손에 들고 들여다보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고유한 존재라는 점이 명확해진다' 같은 흔해 빠진 '발견의 스토리'가 아니다.
내 손바닥에 올려놓은 돌멩이는 그 하나하나가 둘도 없는, 세계에 하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세계에는 하나밖에 없는 것이 온 천지 길바닥에 무수하게 굴러다니고 있다."
_[단편적인 것의 사회학] 중에.
돌멩이를 지그시 바라보는 일,
그리하여 각자가 지닌 '개별성'을 알아보는 일,
그리고 다시 그 개별성의 무수함을 이해하는 일.
여기에 바로 '차이를 뛰어넘는 대화의 기술'이 다 담겨있는 게 아닐까.
'차이를 뛰어넘는 대화의 기술'은 어쩌면, 그 차이를 너와 나 사이의, 건너야만 하는 거리로서가 아니라, 각 개인이 지닌 개별성의 맥락으로서 받아들이는 데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차이가 발견한 것이 아니라 던져진 것일 때, 차이가 권력 구조의 문제와 중첩되어 있을 때, 문제는 훨씬 더 복잡해지겠지만.)
"결핍 속에서도 충분히 좋은 삶을 꾸리는 지혜의 모습이야말로 노년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나 불안의 짐을 덜어주는 해독제로 더 적합할 수 있다."(최현숙, 책 [노년은 아름다워] 중에서)
결핍 속에서도 충분히 좋은 삶을 꾸릴 수 있다. 아니 실은, 모든 좋은 삶이 나름의 결핍을 딛고 있다. 다만 노년은 있던 것이 조금씩 사라지는 시기다. 건강과 에너지가 사그라지고, 남은 날들이 줄어든다. 그렇게 있던 것이 사라질 때 결핍은 숨김없이 모습을 드러내지만, 최현숙 작가는 그럼에도 좋은 삶을 가능하게 하는 지혜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노년의 삶에 대한 이 말은 어쩌면 우리가 지금 맞닥뜨린 저성장시대의 현실에 꽤 어울리는 삶의 태도인지도 모른다. "오늘은 막막하고 내일은 불안한 시대, 좋은 일상을 만들어가는 구체적인 기술을 연구합니다."라는 일상기술연구소의 모토가 "결핍 속에서 충분히 좋은 삶을 꾸리는 지혜의 모습"이란 말과 일맥상통하기도 한다.
저성장시대의 삶이 노년의 삶을 미리 당겨사는 모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금정연 작가의 이야기처럼, 오히려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도 할 것이다. 이때의 두려움은 역시 노년의 삶에 대한 우리의 '막연한 두려움'과 연결된다. 저성장 시대를 받아들이는 것, 다시 말해, 과거 고성장시대에 주어졌던 삶의 모델이 더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노년이 청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일 테다.
우리는 다가오지 않은 노년기를 막연히 두려워하지만, 노년의 하루하루에는 지금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일상이, 때로는 더 좋을 수도 더 나쁠 수도 있을 시간들이 펼쳐질 것이다. 거기에서 필요한 기술은, 과거의 어떤 시절에 통했던 해법에 기대는 것도, 좋았던 어떤 날과 오늘을 견주는 것도 아닌, 주어진 그 상황 안에서의 "매니지먼트"다. 책 [노년은 아름다워]에서 최현숙 작가와 함께 가장 근사했던 인물 김담 님이 제안하는 해법과 닿아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하루하루의 단위로 주어진 상황을 관리하는 것, 그 안에서 고칠 수 있는 것과 고칠 수 없는 것을 가려내는 것이야말로, 노년기뿐 아니라 지속되는 저성장 시대라는 낯선 시대를 살아가야 할 우리에게 유효할, 모든 일상기술을 관통하는 핵심기술은 아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