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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아라 Oct 28. 2019

박종순씨 그리고 나의 할머니를 추억하기


추석 연휴 중 하루, 할머니를 뵈러 추모공원에 갔었다. 2016년 3월 14일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 울산 가족이 모이는 날이면 뵈러 가는데 그날은 글쎄..새삼 코끝이 뜨거웠다.



나의 할머니가 아닌 사람 박종순씨는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다시 상상해보았다. 그 시절, 어찌할 수 없는 격동의 1935년에 태어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꿈꾸는 교육은 있는지 조차 몰랐을 테다. 그나저나 종순씨는 한글을 언제즘 읽게 되셨을까. 가끔 그녀가 티비 속 글자를 소리내어 읽을 때 눈이 초롱초롱한 것 같기도 하고... 아참, 그리고 종순씨는 손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티비를 볼 때도 마늘을 까거나, 밤을 까거나 이야기를 할 때도 손으로 방바닥 먼지를 훔치거나 하면서 한시도 가만히 있는 걸 못 봤다. 그렇다고 멍하니 가만히 있을 때가 아예 없진 않았다. 알츠하이머를 앓기 시작하면서 부터는 멍- 해져 있는 시간이 늘어나긴 했다. 아무튼 내가 중학교 때였나 - 가족끼리 어딘가 갔다가 집에 돌아오는 길 차 안에서 종순씨가 말한 적이 있다. 일제 시대 때 일본어를 배웠다며 일본어로 자기 소개를 하며 차에서 내리는 종순씨의 뒷모습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어린 시절 배운 일본어를 오래도록 기억하는 할머니가 그때의 나는 대단해 보였다. 그렇게 종순씨는 일제 시대 속 유년시절을 보내고 광복 후 결혼을 했다. 결혼하자마자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빨간 대야 같은 데 몸을 숨겼다는 이야기를 언뜻 들은 기억이 난다. 총알 소리도 들었다고 하셨고... 전쟁이 일상이었던 삶을 살았던, 감히 상상하기 힘든 하루를 보내고 조금 숨통이 틀 무렵 할아버지가 하던 사업이 망하고 빚쟁이 생활을 시작하며 지방 여인숙을 전전하며 떠돌이 보부상도 하고, 식당 일, 청소 일 등 자신이 가진 기술로 안 해본 일 없이 하면서 그렇게 50년 넘게 보내셨다. 첫째 아들, 둘째 아들. 셋째 아들, 넷째 딸, 막내 아들까지 학교 보내고 결혼시키기 위해, 남편과 자식 밥 안 굶기기 위해 산 사람이다. 복작복작 징글징글한 일상이었을 테다. 그래도 자식들 결혼과 손주들 탄생으로 이따금 여름이면 전국 곳곳 가족 여행을 떠나기도 했으니 느즈막이나마 좀 쉬었을까?  


내가 태어나니 종순씨는 어느덧 50대. 함께 간 가족여행에서 보글보글 파마 머리로 빨간 점퍼를 입고 빨간 봉고차 안에서 신나게 트로트를 부르는 종순씨가 선명히도 기억난다. 그때만 해도 기운이 넘쳐 사소한 어떤 실랑이에도 노발대발 화내는 종순씨가 희미하게 기억난다. 나는 그녀의 가족이니, 그런 모습이 알뜰살뜰 살기 위해 애쓰는 모습으로 좋게 보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남이 보면 억척스럽게 자신과 가족 것을 챙기는 심상궂은 할머니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다른 삶의 보기를 상상하지 못하는 그런 어른일 수도 있었겠고. 정치적인 견해, 문화생활, 사회에 대한 고민은 그녀에겐 티비 속 저 세상 구경이었을 것이다. 내가 7살이었나, 설날인지 추석인지 친척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종순씨와 그의 남편(할아버지)은 부모님한테 너네 집만 아들이 없다며 혼을 내셨던 게 선명히 기억난다. 4년 뒤 아들인 막내동생이 태어나기 전까지 매년 명절 때면 그런 말도 안되는 잔소리를 하셨더랬다. 지금, 종순씨한테 그 때 왜 그런 잔소리를 하셨냐고 물어보고 싶은데 안 계시네.


때때로 남편의 폭력도 참고, 비합리적인 시댁살이도 참고, 자식의 엇나감도 참고, 나는 모르는 그녀의 가족 관계 속 여러 불화에 화도 냈다가 참기도 했다가, 본인도 본인을 돌볼 여유 없이 후다닥 지난 세월이 야속해서였을까... 70세를 넘기면서 알츠하이머 증세가 두드러졌다. 그렇게 자신을 잊어버리는 병을 앓다가 가신 게 생각하면 할수록 두고두고 안타깝다. 그 때서야 나는 종순씨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었는데 종순씨와의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종순씨가 돌아가시고 3년 째. 종순씨가 애지중지 키운 자식들의 가족 간 만남은 현격히 줄었다. 그도 그럴 만하다. 긴 병에 효자가 없기도 하겠지만 그녀의 존재감이 있었기에 가족끼리 모일 수 있기도 했으니까. 이렇게 써놓고 보니 내가 가진 그녀의 기억은 이어진 끈이 아니라 흩어진 파편이네. 문득 종순씨가 방송 프로그램으로 나온다면 어떤 프로그램이 어울릴까 생각해봤다. 인간극장, 생활의 달인, 세상에 이런일이, 6시 내고향, 전국 노래자랑 등이 떠오른다. 코리아 그랜마 박막례씨가 유튜버 뮤즈로 활동하고 있는 이 시대에 종순씨가 살아있었다면 나도 스마트폰으로 함께 영상을 찍으며 놀 수 있었을까? 흠... 나는 유라님이 아니니 못하겠지... 아무튼 이야기가 길어졌다. 이 글을 쓰고 나니 헛헛하다.


막례씨 채널에 놀러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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