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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아라 Sep 22. 2021

돌아가신 할아버지께

둘째 손녀가 보내는 조금 늦은 편지

2020년 9월 15일 아버지로부터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놀랐다기보다는 가셨구나 하는 마음이었어요, 몇 달 전부터 요양원에 계셨는데 밥을 먹지 않으셔서 링거로 영양을 넣고 있어 몸 상태가 좋지 않았고 돌아가시기 몇 주전에는 심정지까지 와서 가족들은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거든요. 코로나로 요양원 면회가 힘든 상황에서 서울에 계신 고모와 대전 삼촌이 가끔 가서 영면하시기 전 할아버지께 감사하는 인사를 드렸다는 얘기는 아버지로부터 들었습니다.  


작년 겨울, 셋째 작은 아빠 회갑 축하로 모인 자리에서 할아버지를 뵀을 때만 해도 이렇게 금방 가실 줄은 몰랐지만 노인의 건강은 그때그때 다르다는 말을 많이 들었기에 그동안 홀로 사시면서 많이 힘드셨겠구나 싶었습니다. 사실 할아버지의 죽음을 가족이기에 애도하는 마음은 있지만 뭐랄까, 많이 슬프지는 않았습니다. 4년 전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 느낌과 사뭇 달라서 저도 제가 신기할 정도니까요. 코로나 시국이라 장례식장에서 발인까지 못 보고, 할아버지 가시는 길 인사만 드리고 나왔습니다.    


글쎄요,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비롯해 가족들에게 무섭게 대하기도 했고, 남아선호 사상을 갖고 계신 분이라 손자들을 최고로 치켜세우셨던 모습이 제 기억에 강하게 남아있어요. 어릴 때 딸만 둘 있는 저희 집에 항상 너희 집만 아들이 없다고 부모님을 매섭게 혼내시기도 했고, 명절 때 어린 손자들만 본인 무릎에 앉히며 기분 좋게 웃으셨던 할아버지가 너무 미웠습니다. 손주들이 크고 나서야 우리 집 손녀들은 똑똑하다며 칭찬을 해주시기도 했지만 그다지 제 귀에는 안 들어오더라고요. 그래도 아들, 아들 하시며 많이 좋아하셨으니까요.  명절 때 음식 준비다 뭐다 여자들이 일을 많이 했으니 할머니 돌아가시고 왜 가족들이 모이지 않았는지는 아마 할아버지도 늦게나마 깨닫지 않았을까 싶지만... 그래도 할머니 돌아가시고 자주 할아버지를 전화로 안부를 묻고, 음식 챙겨주시는 건 4명의 아들들이 아니라 1명의 딸의 역할이 컸을 것 같아요. 고모에게 고마운 마음 가지고 가셨길 바랍니다.  


할아버지의 어린 시절이라던지, 살아온 세월에 대한 이야기를 할아버지로부터 들은 기억이 없네요. 매번 아버지들과 술 마시면서 감정이 격해져 했던 말들은 기억에 있고요. 그 기억을 통해 할아버지가 억울한 마음을 가지고 사시는구나 하는 걸 느꼈습니다. 가족관계가 좀 복잡했던 어린 시절, 전쟁을 겪은 유년 시절을 지나, 할머니와 결혼, 5명의 자식의 아버지가 되어 사업을 벌이던 청년 시절 그리고 사업이 망해 빚쟁이들에 쫓기면 전국을 돌며 소쿠리 장사를 했던 중장년 시절 등 저희 부모님, 할머니 등 다른 가족들을 통해서 할아버지의 인생을 조금 알 수 있었습니다. 할머니보다 세 살인가 어리시다는 것도 제가 한참 커서 알았고요. 힘들게 사신만큼 노후엔 할머니와 다정히 사셨으면 했는데 뭐, 제가 끼어들 관계는 아니지만 좀 더 할아버지가 할머니의 알츠하이머 병을 일찍 알아차려주셨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금도 남아있습니다.


할머니가 아프시고 난 후 할아버지도 많이 힘드셨겠지요. 매일같이 본인의 밥을 챙겨주던 사람에게 자기가 챙겨주는 일상으로 삶의 방식이 바뀌었으니까요. 할아버지 인생에서 억울함, 분함이 상쇄되지 않고 자리 잡고 있는 다시 또, 억울하다 느꼈을 수도 있었겠어요. 할머니 돌아가시기 전에 저희 부모님이 두 분을 모시고 살기도 저도 시간을 내어 뵈러 가기도 했었지요. 할머니의 상태도 놀랍게 안 좋아지셨지만 할아버지 역시 너무 기운이 없으셨지요.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할머니 장례식장에서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떠나간 슬픔과 함께 자신의 끼니는 이제 누가 챙겨주나 하며 걱정하셨지요. 물론 술을 드셔서 맨 정신에 한 말은 아니었지만 그 말을 들은 저로썬 놀라기도 했지만 할아버지가 많이 불쌍하기도 했습니다. 가부장제가 심한 시대, 그 제도를 견고히 만든 사람이면서도 결국 그 제도로 피해자가 되기도 했으니까요. 자신의 끼니를 자신이 챙기지 못했을 때 챙겨주는 사람이 없다 원망하는 사람이 되진 말아야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저희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뒤를 잇지 않게 자주 얘기해주고 있습니다. 본인 밥은 본인이 챙겨야 한다고요. 할아버지와는 다르게 조금씩 밥도 챙기고, 청소도, 설거지도 하십니다. 다만 얼굴은 점점 할아버지를 닮아가네요. 물론 할머니의 얼굴도 보이고요. 저의 노년은 어떤 모습일까요? 할아버지를 조금은 닮겠지요 :)    


조.귀.복은 할아버지의 이름입니다. 한자로 귀할 귀, 복 복자를 써서 귀한 복을 가진 사람으로 자라라는 의미일 텐데 그런 인생을 사시다 가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본인이 할 수 있는 만큼 열심히 사셨을 테니, 억울함은 놓고 떠나셨기를 바랄게요. 명절에 친지들 모일 때면 우리 손주들이 건강해서 고맙다 하셨는데 그 건강의 유전자는 할아버지 덕분일 거라 생각합니다. 감사드려요.   


할아버지, 그곳에 간 지 1년이 넘었는데 어떠신가요?


오늘 하늘이 참 맑네요. 부디 그 세상에서 할머니를 만나셨거든, 생전에 못했던 배려와 예쁜 말 많이 해주시길, 할머니의 꾸지람 잘 받아들이시고요. 얼마 전 할아버지 형제도 만나셨을 텐데 싸우지 마시고 할아버지가 자주 두시던 바둑 두시며 지내시길.  


이만 쓰겠습니다.


조귀복의 둘째 손녀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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