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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아라 Jan 11. 2023

읽고 듣고 말하고 쓰는 사람은 많지만 아는 사람은 드문

 영화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리뷰 

읽고 듣고 말하고 쓰는 사람은 많지만 아는 사람은 드문 세상에서 어떤 사람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 영화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를 보고  

(브런치 타이틀 글자수가 30글자 이내라 본문에 타이틀 전부를 적어둡니다. 또한 이 글은 대학원 글쓰기 수업 과제로 제출한 글이기도 합니다.)



종합예술인 영화를 감상하는 이유는 그 영화를 보는 관객의 수만큼이나 다양하게 있겠지만, 나는 무언가 알기 위해서 영화를 볼 때가 많다. 러닝타임 동안 집중 모드로 공감각적으로 느끼며 보기에 기억에 오래 남아 학습용 영화보기를 즐긴다. 몰랐던 것을 알게 되는 기쁨을 영화를 통해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고자 하는 이 나의 마음과 욕구, 호기심은 어떻게 생기는 걸까? 나 스스로 만드는 것일까? 어릴 때 학습으로 꾸준히 그래야만 하는 습관으로 반복되는 것일까? 영화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이하, 더 리더)를 보며 알고자 하는 욕구의 기원을 고민하는 재미를 느꼈다. 이 영화는 역사 영화이자, 로맨스 영화이자, 법정 스릴러 영화이다.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을 소재로 한다는 점에서 역사이며, 청소년 남자와 성인 여자의 애정씬이 꽤 자극적이라 관객이 감정적으로 몰입하는데 강력한 장치가 된다. 그리고 여자 주인공이 나치에 조력하는 일로 법정 심판을 받는 씬에서는 주인공에 감정이입해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법정 관객석에 앉아 어떤 판결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청중이 되기도 하면서 강한 긴장감을 느꼈다. 이 영화를 만든 감독 스티븐 달드리는 어느 인터뷰에서 무지로 인해 저지른 악행이라 할지라도 용서받을 수 없다는 마음으로 영화를 만들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은 무엇일까?’ ‘아는 것이 많다는 것은 무엇일까?’ 아니다. ‘과연, 아는 것은 무엇일까?’ 이 질문이 영화 [더 리더]와 어울릴 것 같다.  


영화는 1995년 중년의 마이클(랄프 파인즈)이 과거 자신이었던 소년 마이클(데이빗 크로스)을 회상하면서 시작한다. 1958년 길에서 성홍열을 앓다가 청년 한나(케이트 윈슬렛)가 구해준 인연으로 마이클은 한나에게 빠지고 둘은 연인이 된다. 그 시대(이 시대도 마찬가지겠지만) 청소년과 성인의 사랑은 한나의 집에서만 이뤄질 수 있었고, 마이클은 한나의 요청으로 책을 읽어주며 한나의 미디어가 되어준다. 한나는 마이클의 낭독으로 문학의 재미를 맛본다. 그런 일상의 재미도 잠시, 둘은 갑작스럽게 헤어진다. 트램 검표원으로 열심히 일한 한나에게 사무직 승진의 기회가 오지만 한나는 문맹이라 사무직을 맡을 수 없어 직장과 집을 떠난다. 마이클에게 글 한 줄 남길 수 없었다. 마이클은 영문도 모른 채 한나에게 차였고, 시간은 흘러 1966년 마이클은 트렌치코트가 어울리는 법대생이 되었다. 학교 세미나로 언론에 관심을 받는 홀로코스트 재판을 참관하며 법을 배우려는데 그 자리에서 한나의 목소리를 듣는다. 나치를 도운 죄를 묻는 자리. 한나는 수용자를 감시하는 주어진 일을 했을 뿐, 무슨 잘못을 한 것인지 법을 어긴 것인지 모를 표정으로 판사를 바라본다. 그런 그녀를 보는 마이클은 고통스럽다. 자신과 사랑을 나눈 사람이 나치의 부역자라는 사실에 고통스러운 건지, 말 한마디 없이 자신을 찬 사람을 아직도 잊지 못해서 괴로운 건지 모를 표정으로 연신 담배를 피우며 눈물을 흘린다. 한나와 같이 재판받는 동료들은 한나가  책임자였다며 죄를 덧씌우고 한나는 문맹을 드러냈으면 풀릴 덫보다 문맹임을 드러내기를 감춘다. 그래서 무려 무기징역을 선고 받는다. 주어진 벌 역시 ‘성실히' 채우는 한나에게 마이클의 목소리가 들어있는 카세트테이프가 배달된다. 단조로운 수감 생활에 재밌는 미디어 덕분에 한나는 열심히 청취하고 마침내, 테이프가 산더미처럼 쌓인 후에야 글을 알고자 하는 마음을 행동으로 옮겨 문맹에서 읽고 쓰는 자가 된다. 하지만 한나가 나치를 조력한 일에 대한 죄의식은 문맹이었던 시절과 별반 달라지지 않았음을 안 마이클은 한나에게 실망하고 만다. 그 실망감을 느낀 한나는 가석방 직전 자기만의 방에서 스스로 죽어버렸다. 


한나는 무지했지만 몽매한 사람은 아니다. 공감 능력이 없는 사이코패스도 아니고 자신이 글을 모른다는 것이 부끄럽다는 것을 알았다. 그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계급으로 본인의 생을 본인의 노동으로 살아내야 하는 전쟁시대 사람이었다. 그 시대는 글을 몰라도 살아가는 데 큰 지장이 없었다. 또한 그 시대는 여성이 모르는 것이 기본값인 시절이기도 했었다. 나의 어머니가 청소년 시절이었던 1970년대  고등학교를 가고 싶었지만, 풍족하지 않는 집안 사정에 형제만 9명이었던 대가족에 자신이 고등교육을 받을 확률은 자신의 기대보다 훨씬 낮았다. 어머니는 고등학교에 가고 싶다고 자신의 아버지께 말했다가 외려 크게 혼나서 하염없이 울었다는 이야기를 거짓말 조금 보태어 백 번은 들었던 것 같다. 여성이 더 배우고자 하면 질타를 맞았던 그 시절 이야기는 실재한 역사였음을 나는 나의 어머니로부터 배웠다. 이렇게 알기까지도 힘든데, 안다고 해서 바로 깨우치고, 깨우침을 행동으로 옮기며 지행일치, 앎과 생활이 합일되는 삶을 사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히틀러가 글을 몰라, 아는 것이 없어서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른 것이 아니기에 무지하다고 해서 나쁜 일을 저지르는 것 또한 아닐 것이다. 하지만 한나는 왜 알고자 하는 욕구를 본인 스스로 지연시켰을까를 고민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중산층 이상의 엄숙한 집안에서 고등교육을 받고 자랄 수 있었던 마이클과 다르게 한나는 알고 싶다 보다 먹고 사니즘이 더 우선순위였다. 알고 싶은 마음도 알고 싶을 때가 있어야 생기는 것일 테다. 언제 굶어 죽을지 모르는데 책이 무엇이고, 영화가 무엇이냐 말이다. 길거리 아픈 소년을 자신의 집으로 들여 보살펴 주는 측은지심은 배우지 않아도 행할 수 있던 한나였지만 많은 사람을 죽이는 데 일조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정의는 몰랐던 한나. 과연 내가 한나였다면 나의 죄를 묻는 법정에서 어떻게 대답할 수 있었을까? 나는 지금 무엇을 알고 있나? 알고 있는 것이 있기는 한 것일까? 이 세상 모르는 것투성이다. 다만,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글을 읽고 쓰는 대가임에 안도감을 느낀다. 글을 읽는다는 것은 필요를 넘어 자신을 다른 세계로 가닿게 해준다. 궁금한 게 생기고, 질문을 하게 되고, 답을 찾게 되고 또 다른 궁금증이 생기는 고리가 지속적으로 이어져 읽고자 하는, 알고자 하는 자신을 다른 세계로 가게 해주는 것이다. 글을 몰라도 살 수 있지만 자신의 세계가 확장되는 것 또한 모르니, 타인이 시키는 것만 하게 되고, 타인에게 종속되는 것조차 몰라 부지런한 악인이 자신도 모르게 돼버릴 수 있다. 모른다면 모를 세계에서 끝나지 않는 것이다. 주위 사람과 사회에 영향을 끼친다. 하지만 이는 아는 사람만 알고 또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것이다. 어쩌면 안다는 것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고통과 환희의 이중주 속에서 나만의 화음을 끝없이 찾아가는 과정일 것이다. 그 악보의 끝은 아마도 죽음으로 완성될 것이다.  


영화 감상을 사견을 붙여 정리하다 보니 문득 영화 제목에 시비를 걸고 싶어졌다. 이야기의 축은 한나로 세워놓고 소년의 시점에서 붙인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보다 [더 리스너: 소리로 책 읽는 여자]라고 지었다면 어땠을까. 내가 이 영화를 보고 생각한 덕에 또 하나의 세계를 알아버렸다. 그리고 엔딩 크레딧에서 보이는 유명한 성범죄자 영화 제작자 이름 ‘하비 와인스타인’을 봐버려서 미투 운동을 상기했다. 더 나아가 미투 운동을 다룬 최신 영화 [그녀가 말했다]를 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다다랐다. 세계는 복잡하고 알아야 할 것은 너무 많다. 그러니 내게 주어진 선택지는 계속 읽고 듣고 말하고 쓰면서 알아가는 사람으로 살아볼 수밖에 없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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