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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아라 Jan 07. 2024

내가 시작하고 내가 끝내는 한 달

2023년 12월 일하고 공부하고 활동한 일기 

#별안간 사주

친구와 오랜만에 사주를 보았다. 11월에 친구와 통화를 하다가 불현듯 사주나 보러 갈까 하다가 지인이 알려준 곳이 마침 생각나서 12월에 같이 보러 가기로 한 것이다. 앞날이 많이 궁금하거나, 과거의 미련이 있는 편도 아니고, 인간관계의 고민이 있어서 질문할 게 생각나진 않지만 내가 태어난 날로 말미암아 운을 알아보는 게 신기하다. 내년 나의 운은 대운일 거라는 말에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올해는 별로 좋지 않았겠다는 말에 새삼 그렇게 생각되기도 하지만. 뭐, 내가 살아가는 거니까 나 하기에 내 운이 달려있다는 걸 확인하는 자리였다.   


#꾸동친(꾸러미 동네 친구의 준말) 

올해는 스스로 제철 채소와 과일을 잘 챙겨 먹었다. 여성농민의 농산물을 판매하는 직장(언니네텃밭)으로 매번 농부 언니들이 보내주는 선물들 덕분이다. 거기다 12월부터는 제철 꾸러미를 동네 친구와 나눠서 매주 받기로 해서 (이하:꾸동친) 제대로 된 끼리를 자주 챙겨 먹었다. 꾸러미는 여성농민들이 직접 지은 농산물을(무제초제) 꾸러미로 만들어 편지와 함께 매주 혹은 격주로 보내는 언니네텃밭의 장수 구독 상품이다. 예닐곱 가지의 농산물과 가공품이 들어있는 박스를 열자마자 편지가 먼저 보이는데, 이 편지가 분명 타이핑된 글인데 손 편지 같은 감성이 녹아있다. 어떤 언니가 어떤 농산물을 보냈는지, 어떻게 재배했고 가공했는지 적혀있는 글이 참으로 정답다. 혼자 먹기에는 양이 많았는데 동네 친구와 나누니 양이 적당하다. 꾸러미와 동네 친구 덕에 장 보는 수고를 덜고, 재료가 정해졌으니 뭐 해 먹는 고민도 줄고, 마트에서 충동구매하는 건들이 줄어드니 경제적이기도 하다. 약속 외에 혼자 외식하는 횟수도 줄었다. 집에 꾸러미 재료가 있으면 얼른 이것부터 먹어야 하기에 사 먹는 걸 지양하게 된다. 건강한 제철 재료로 나를 위한 끼니를 자주 해 먹을 수 있고, 지역의 농민과 연결감, 감사함까지 두둑이 챙길 수 있어 먹을 때마다 든든하다. 계속 잘해 먹으리라. 

된장찌개에는 웬만한 채소를 넣어도 잘 어울린다


#망했다! 졸업시험  

대학원 4학기 째. 졸업시험을 볼 수 있어 신청했다가 공부를 못했다. 아니, 안 했다가 더 정확할 것 같다. 충분히 시간을 내어하면 됐을 텐데, 이런저런 일들로 미뤘다가 벼락치기로 조금 하는 식의 불경을 저지른 나 때문에 재시험까지 치고는 불합격. 어쩌자고 대학원까지 다니면서 이러냐, 나여 - 하루 정도 환멸의 시간을 보내고 다음 학기에 만회하리라 굳게 다짐했다. 으이그...  

5학기 때는 붙을 수 있도록!



#도공디공 

서울 상수에서 올해를 회고하고 2024년에는 무슨 공부를 해볼지 얘기하는 송별회를 가졌다. 올해도 도시 공부를 하는 모임인만큼 여기저기 잘 돌아다녔지만 영덕 도서관에서 강의한 경험이 벅찼다. 내년에는 무슨 공부를 해볼지 아직은 생각나는 게 없지만, 여러 지역을 돌아다닐 것 같은 기시감이 든다. 그나저나 오랜만에 상수 이리카페를 가서 얘기를 나눴는데 몇 년 만에 왔지만 편안한 익숙함을 느끼며 있었다. 이렇게 한 곳에서 오래 공간을 이어간다는 게, 게다가 문화예술인들에게 좋은 장소로 기억에 남을 공간으로 운영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기에 사장님이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이 또한 도공디공에서 공간을 공부한 덕분에 깨닫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도공디오 12월 회고는 인스타그램에서 확인해 주세요
이리카페에서 본 공심여일월 : 모든 것은 평등하다


#베토벤 교향곡 9번과 크리스마스

언제가 처음인지는 모르겠는데, 클래식 카페에서 일할 때 연말에는 베토벤 교향곡 9번을 듣는다는 것을 알고 난 뒤 서울시향, KBS 교향악단 등에서 하는 연말 콘서트를 찾아갔었다. 베토벤이 청력을 완전히 잃고 만든 음악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5악장 모두 심금을 울린다고 할까, 특히 4,5악장의 합창은 한 해를 환희로 마무리하는데 아주 큰 울림을 준다. 올해는 막내 동생과 KBS 교향악단의 연말 콘서트를 갔다. 비록 자리는 좋지 않았지만 내 귀로는 충분히 만끽했다. 베토벤 교향곡 9번을 라이브로 들어야 나의 연말이 시작되는 것 같은 기분이다. 일종의 나의 연말 의식인 셈이다. 


요 몇 년간 크리스마스에는 누군가와 산을 가거나, 모임에 갔는데 올해는 구태여 약속을 잡고 싶지 않았다. 홀로 아주 조용히 쉬면서 보냈다. 책 읽고, 산책도 하고, 꾸러미 재료로 밥도 잘 챙겨 먹고, 동네 카페에서 밀린 일기도 쓰고, 보고 싶었던 영화 메타포르제의 툇마루도 보면서 나 홀로 집에서 유유히 시간을 보냈다. 좋았다.   

크리스마스에 본 달과 영화


#가족과 연말 그리고 서울의 봄

12월의 끝은 본가로 향했다. 2024년 1월 1일이 음력으로 아버지 생일이기도 하여 연말연시는 가족과 보내고 싶었다. 거창한 선물은 아니더라도, 가족 달력을 만들어 선물로 주고 싶어 가족사진들을 모아 포토샵으로 후다닥 작업해 인쇄소에 맡겼다. 따릉이 타고 충무로 인쇄소에 달력을 찾으러 가는 길, 종로-을지로-충무로로 이어지는 길에 가보고 싶은 점포들이 많았다. 그렇게 찾은 달력을 갖고 본가에 가서 가족들과 운동도 하고, 밥도 먹고, 엄마의 MBTI 검사도 해보고, 영화 서울의 봄도 같이 보고, 우여곡절 끝에 엄마와 목욕탕에서 서로 등도 밀어주었다. 


영화 서울의 봄은 12.12 군사반란이라는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역사와 전두환을 모티브로 한 캐릭터가 나오기에 개인적으로 너무 싫어서 보고 싶지 않았지만 같이 볼만한 시간대가 마땅찮아 선택했다. 영화를 보면서 가슴을 치는 분노의 순간이 많았지만, 정말 잘 만든 영화였다. 역사적 사실로 만든 인물 간 연결고리로 개연성을 충분히 확보하고, 주고받는 대사로 긴장감을 만들고, 실제 인물과 허구를 적절히 잘 섞어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고, 소품으로 디테일한 풍자까지 - 이미  어떤 내용인지 알고 있어도 끝까지 보게 하는 힘을 영화적 서사에 잘 실었다. 보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 보기를 잘했다는 생각으로 바꾸어주었다. (그럼에도 연말에 가족과 같이 볼만한 영화는 아니었지만;;)

엄마의 마실용 신발과 엄마밥 그리고 울화통 터지는 영화
서울의 달과 울산의 해

 

1년 동안 구독한 2개의 신문을 끊었는데 동네 신문보급소가 계속 넣어주는 끈기에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지만 끝이 났고, 대학원 수업 종강날 술을 너무 많이 먹는 바람에 오래간만에 바깥에서 자다가 입 돌아갈 뻔 아찔한 날도 무사히(?) 보냈고, 치과에서 새로운 치아를 생성하느라 70만 원을 플렉스하고(ㅠㅠ), 한파에도 아침에 달리고, 내년에 같이 일할 동업자도 생겼다. 2023년 12월을 미련 없이 보냈으니, 기대되는 2024년을 맞이해야지. 아무렴, 그래야지. 


그렇게 내가 시작하고 내가 끝낸 한 달, 한 해가 갔다.  


(2024년에도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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