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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연맨 Mar 20. 2024

미안함과 고마움을 담아, 생리에게

우리 부모님은 엄청 알뜰하다. 엄마가 최근에 30년 다닌 회사를 퇴직하고 나서는 더하다. 부모님의 진득한 취미 중 하나는 커피를 마시는 것인데, 한 잔에 4~5천 원을 훌쩍 넘기는 요즘 커피값은 우리 부모님으로 하여금 무료로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이벤트쿠폰, 혜택쿠폰들의 수집에 열을 올리게 만들었다.


나는 보통 이런 모습에 “진짜 대단하다.” 라며 웃는 정도가 다였으나, 어느 날은 그 모습이 너무 맘에 안 들었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짜증이 솟구쳤다. 내 것도 쿠폰으로 사주겠다는 엄마를 만류하고 나는 굳이 돈을 내고 커피를 사 마셨다. 그러면서 나는 짜증과 동시에 내 자신의 인성에 대한 깊은 혐오에 빠졌다.


며칠 전에는 친구가 오랜만에 새로운 연애를 한다는 사실을 듣게 되었다. 대충은 알고 있던 터라 놀라기보단 “역시 그랬군.” 하며 축하를 건넸다. 하지만 나는 남자친구와 시간을 가지면서 그를 엄청 그리워하던 상황이었기에 진심으로 축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엄청 궁금하지도, 대리 설렘 따위도 없었다. 이런 나 자신이 나는 너무 싫었다. 심지어 이 친구는 내가 힘들 때 가장 힘이 되어준 친구였기에 나의 이기적임에 더욱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근 며칠간 이런 내 예민함과 싸우며 스스로의 인성에 대한 깊은 좌절감에 빠져있던 어느 날, 아침부터 배가 살살 아프더니 ‘어라? 이 느낌은 혹시..?’


곧바로 가방에서 생리대를 챙겨 화장실로 달려갔다. 화장실로 달려가며 나는 ‘제발 생리여라. 부디.’ 라며 애타게 기도했다.


이윽고 이 모든 원흉인 생리를 마주했을 때, 비집고 삐져나오는 웃음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아 나는 인성파탄자가 아니었군. 다 너 때문이었구나. 생리 이 자식!’

최근의 고민과 스트레스가 한방에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싸르르한 배 통증보다 안도감이 주는 행복이 더 컸다.


그러자 문득, 내가 생리를 보고 이토록 반가워했던 적이 있나 싶었다. 늘 생리는 수영장 가기 전, 중요한 시험 전에나 나를 찾아와 원망의 대상이 되기만 했었는데. 원망의 화살이 나에게 향해 있던 지금, 그 밉던 생리가 모든 화살을 받아주었다.


따지고 보면 생리 자체도 내 안에서 일어나는 나의 일부인 것을, 마치 외부적인 요인인 마냥 취급하는 게 웃기긴 하다. 하지만 생각을 바꿔보면 어떨까. 내 안에서 일어나는 건 생리뿐만이 아니다. 짜증, 예민함, 이기적임, 시기와 질투와 같은 미운 감정들도 나에게서 일어나는 것들이다. 이 감정들을 조금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다정한 눈길로 봐준다면 화살의 끝이 조금은 뭉툭해지지 않았을까? 내가 늘 미워하던 생리도 오늘은 나에게 위안이 되었던 것처럼, 나의 못난 마음들도 언젠간 내가 용서해 줄 수 있지 않을까?


12살 때부터 매달 하던 생리를 거의 30살이 다된 지금에서야 나는 기뻐해줄 수 있었던 것처럼 오랜 시간이 지나 나도 나를 온전히 안아줄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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