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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영 Jul 13. 2023

나의 10이 당신의 10과 다르더라도


  10이라는 숫자는 괜히 낯설게 느껴진다. 왜일까? 1이나 2는 금방 떠오르는데. 고민하다 보니 10은 1부터 세었을 때 맨 뒤에 오는 숫자이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 싶었다. 제일 흔한 1, 2, 3. 10은 그 뒤로도 차근차근 꾸준히 나아가야 만날 수 있는 숫자다. 끈기 같은 숫자.


  스스로 끈기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최근 몇 년을 돌아보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입시와 취업을 준비할 때는 새벽까지 책상 앞에 앉아 공부했다. 이사를 자주 다녀서 중단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수영은 내게 가장 잘 맞고 재밌는 운동이어서 어릴 때부터 기회가 닿는 한 계속 등록해서 다녔다. 고등학생 때 우연히 해금을 알게 된 후, 취업하면 꼭 배우자 했던 바람대로 해금을 꾸준히 배웠다. 학생일 적 언제나 성실상이나 모범상을 받곤 했으니까 성실함만은 다른 사람에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했다.


  내 그런 꾸준함은 공부나 직장, 그리고 취미였던 수영과 해금을 비롯한 많은 것들을 어느 정도까지 성취하는 데에는 도움이 됐지만, 어느 순간부터 더 잘하지 못하는 자신을 보며 괴로워하곤 했다. 일정 수준 이상에서는 늘 타고난 신체 능력이나 재능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나는 내 10만큼 노력하고 있는데도 재능이 있는 사람들은 3만큼의 노력으로 내가 하는 만큼을 해내는 기분이었고, 5만큼의 노력으로는 나의 10을 쉽게 뛰어넘어 버리는 것만 같았다. 그들을 보면 나는 결국 뭐든 잘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코로나 유행 시기와 맞물려 좋아했던 일들을 놓아버린 줄도 모르게 모두 놓아버렸다.


잘하지 않으면 가치가 없나? '잘한다'는 것의 기준은 어디 있지?

  혼자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던 어느 날, 우연히 예전에 활동하던 대학 동아리의 유튜브 영상을 보게 됐다. 내가 활동할 땐 유튜브 채널이 없었지만 요즘 활동하는 후배들이 유튜브 채널을 만들어 아기자기하게 운영 중이었다. 그중 한 영상에서는 올해 집행부가 졸업한 선배들에게 궁금해하는 질문들로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었다.


  "악기를 잘하는 것과 재밌게 하는 것 중 무엇이 중요한가요?"

  동아리 활동을 그만둔 지 십 년에 가까운 지금, 그 질문을 보고 다시 숨이 턱 막혔다. 동아리 활동 내내, 그리고 졸업 후에도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내가 활동했던 풍물 동아리는 다른 학교의 동아리보다 실력이 좋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다른 학교 동아리와의 연합 발표회에서 우리 학교가 상장구(장구 치배의 으뜸으로서 다른 평치배를 이끄는 역할)를 놓친 적이 없다는 말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그 시절에도 연습이나 회의 후 뒤풀이에서 '잘해야 하냐, 재밌게 해야 하냐'는 얘기는 곧잘 나왔다. 내심 재밌게 하면 된다는 말을 듣고 싶었지만, 당시 선배들은 언제나 '잘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어리숙한 신입생이었던 나는 선배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말았다. 그 결과, 동아리 활동을 할수록 힘이 들었다.


  집행부가 되면서 나는 우리 학교 풍물패의 상장구가 됐고 '잘하는' 상장구여야 한다는 압박감이 퍽 부담스러웠다. 선배 상장구들은 내가 봐도 장구를 참 멋지게 잘 쳤다. 그에 비해 나는 아무리 내 나름대로 노력해도 그 정도에 이를 수가 없었다. 한참을 괴로워하다가 그즈음 악기에 흥미를 몽땅 잃었다. 


  집행부를 마친 후의 어느 날, 연합 발표회를 함께했던 다른 학교 친구가 인사동 거리에서 공연하는 모습을 보고 많이 놀랐다. 학교 대표나 상장구로서 부담감을 가진 모습이 아니라 악기를 치면서 행복해하고 있다는 걸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악기 실력도 굉장히 늘어 있었다. 사실 함께 연습하던 시기에 그 학교 친구들은 우리 학교 동아리원들보다 자세나 실력이 부족했다. 그런데도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항상 웃으면서 악기를 치는 모습이 늘 신기했는데, 그 친구들이 즐거움을 간직한 채 일취월장한 실력으로 나타난 것이다. 무슨 청춘 만화도 아니고. 그렇지만 정말이었다. 그리고 뒤늦게야 솔직하게 그들을 부러워했다. 만약 지금 후배들이 내게 악기를 잘하는 게 중요한지, 재밌게 하는 게 중요한지 물어본다면 꼭 재밌게 하라고 말하고 싶다.


   생각해 보면 내가 그 시절 좌절했던 이유는 나를 다른 사람들과 비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의 기준이 다른 사람들에게 맞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좋아하는 일을 잘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어떤 일을 하든 잘해야 재밌다는 말도 일리 있는 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무언가를 특출나게 잘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주변에는 언제나 나보다 적은 시간을 쓰고도 나보다 잘 해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만큼 해내지 못하는 내 모습에 괴로워하다 어느 순간 내가 재미있게 느꼈던 처음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그렇지만 누군가와 비교하며 조급해할 필요는 하나도 없었는데. 내가 어떤 일을 다른 사람보다 못한다는 게 내가 좋아하는 일을 포기할 이유가 되는 건 아니었다.


  최근 한 인플루언서의 SNS에서 마음에 와닿는 구절을 읽었다. '나는 나이고 남이 될 수 없다.' 글 전체 내용은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말고 살자는 거였지만 내게는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내가 나를 온전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 아직도 배워가는 중이다. 나는 나이고 남이 될 수 없다. 당연한 말이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의 기준을 나에게 그대로 적용할 수도 없다. 다른 사람은 3만큼의 노력으로 이뤄내는 일을 하기 위해 나에게는 10만큼의 노력이 필요할 수 있다. 나의 10은 당신의 기준으로 기대한 10과 다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그 자체로 나이고 내 고유한 삶을 살아내면 되는 걸. 내 속도대로 뚜벅뚜벅 걸어가면 그뿐인데, 나는 그걸 인정하기 힘들어했구나.


  사회적 거리두기가 완화되고 수영장이 다시 개장하면서 수영을 다시 등록했고, 해금을 집에서 다시 연습해보기 시작했다. 돌이켜보면 나는 꾸준함으로 입시와 취업을 해내고, 할 수 없을 것만 같던 수영도 접영까지 배웠고, 끼익 거리던 해금을 연습해 여러 공연과 국악방송 출연도 했다. 그 과정에서 느꼈던 즐거웠던 기억과 성취했던 경험들은 사라지지 않고 내게 남아있다. 


  내가 좋아했던 처음을 다시 되짚어 본다. 수영할 때 몸에 열이 올라 차가운 물이 따뜻해지는 느낌, 숨이 차게 묵직한 물을 가르는 느낌을 좋아한다. 해금 특유의 간질간질하고도 간절한 음색이 내 손가락의 강약을 통해 흘러나오는 감각을 좋아한다. 그런 것들은 오롯이 내가 느낄 수 있는 즐거움, 나만의 삶에서 내가 누릴 수 있는 좋아함이다. 그리고 사실은, 장구도 여전히 좋아한다. 취업 후 몇 년이 지나고도 사회인 풍물패를 찾아 방문했을 만큼. 그러니까 나는 다시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 좋아하던 일들을 계속해보고 싶다. 다른 사람들보다 느리고 부족하더라도, 하나부터 열까지 차근차근 헤쳐 나갈 나만의 삶을 살자고 다짐해 본다.


* 비혼여성을 위한 잡지 <비평> vol.10, 2023.10월호에 게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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