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명과 비전의 발견
무인양품의 포스터 〈지평선〉을 통해 처음 알게 된 디자이너, 하라 켄야.
무지(MUJI)가 지향하는 철학과 가치를 이토록 명확하고 절제된 시각 언어로 전달할 수 있다는 점에 깊은 인상을 받았었다. 특히 “이것으로 충분하다”라는 메시지는 20대의 내 가치관과 삶의 방식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무언가를 더 채우기 위해 분주하던 시절, 키작은 이유가 무거운 가방 때문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으니. 여튼 간소한 제품들이 진열된 무지 매장을 처음 방문했을 때의 충격을 아직도 기억한다. 이후『무인양품의 보이지 않는 마케팅』을 읽으며, 하라 켄야만의 깊은 디자인 철학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철학을 중심으로 무지가 ‘제품 브랜드’를 넘어 집과 호텔 사업까지 아우르는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로 확장해 나가는 과정을 보며, 사람들의 삶에 스며들어 그들의 크고 작은 일상과 가치관에 영향을 주는 브랜드 메시지의 힘과 매력을 경험하게 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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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10월 복합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일본 도쿄의 아크 힐즈와 아자부다이 힐즈 지역개발을 위한 새로운 컨셉북에 하라 켄야가 참여했다는 글을 다시 접하게 되었다. 도쿄를 바꾼 빌딩들의 책은 모리빌딩과 하라 켄야는 이 프로젝트에서 먼저 ‘시대의 변화’와 ‘도시의 역할’, 그리고 ‘도쿄가 담당해야 할 역할’을 정의했다고 한다. 이후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리더의 모습을 설정하고, 그들이 모여 만들어갈 아크 힐즈와 아자부다이 힐즈 에리어의 미래 비전과 풍경을 제안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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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빌딩은 최초의 인텔리전트 빌딩이 탄생한 아크 힐즈 에리어를 지적 사색자(Intelligent Thinker)가 모이는 도시로 새롭게 진화시키려 합니다. 글로벌한 지적 사색자들이 서로 만나고 공감하며 시너지를 만들어 새로운 시대의 비즈니스와 라이프스타일을 창조하고 발신하는 선순환을 만들고자 합니다. 도쿄 안에 독자적인 글로벌 커뮤니티를 형성해 도쿄와 일본, 나아가 세계의 미래에 기여하는 지역이 되는 것이 목표입니다.”
지적 사색자(Intelligent Thinker), 천재같다…이런 개념을 설계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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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라 켄야는 단순한 디자이너가 아니라, 사상가이자 개념을 설계하는 사람이다.『디자인의 디자인』에서 “이것으로 충분하다”는 공(空)의 개념을 제시했고, 2008년 『백』에서는 창조성을 위한 ‘비움’을 이야기했다. 최근작 『저공비행』에서는 지금을 ‘유동(遊動)의 시대’로 정의하며, 다시 ‘로컬리티’의 힘을 말한다. 동시대를 읽어내고, 그 안에서 새로운 아젠다를 제안하는 감각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그의 작업을 따라가다 보면 늘 그 질문 앞에 멈추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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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업(業)에서의 비전? 사명?을 다시 발견해 가는 시간 속에 있다. 사람들의 더 나은 삶, 더 나은 내일을 위해 하늘의 메시지를 브랜드와 공간에 담아 도시로 전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사명.
브랜드, 공간, 콘텐츠, 커뮤니케이션 기획 전반에서 결국 내가 중심축에서 해온 일은 공간 브랜드의 철학, 가치, 컨셉과 개념을 언어로 가시화하는 역할이었다는 사실을 더 또렷이 인식하게 된다.
그간 이 커리어를 이어오며 항상 확신이 없던 내가, 이 나이에…오히려 더 선명한 뜻을 품고 더 가보고 싶다는 열정을 느끼고 있다니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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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침 나이가 들 수록 더 깊은 개념을 끌어 올리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끝까지 붙들 수 있게 해준 인물이 하라켄야다.
63세의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아직 좀 더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하고 싶은 게 있거든요. 경험을 쌓고 나서야 보이는 게 있어요. 20대에 말했다면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을 이야기도, 연차가 쌓이니 처음으로 귀 기울여주는 사람이 생기더군요. 색다른 생각이나 사회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은 오히려 30대 디자이너가 절정이라고 생각해요. 60대는 빨리 은퇴해야 하는 나이라고들 말하지만, 같은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조금씩 움직이며 일하고 있으니 제가 설 수 있는 곳에서는 계속 서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중요한 건, 하고 싶은 게 보이느냐는 거예요.
보인다면, 끝까지 가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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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것이 분명히 보인다면 끝까지 가도 된다는 말.
그 길에 선함이 있다면, 결국 인도하심도 함께할 것이라는 믿음.
현실의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그의 존재가 그리고 문장이 이 길을 걷게 하는 충분한 이유를 줄 것 같다.